[서평]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 - 하인라인의 두 얼굴

2016. 10. 20. 22:30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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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 - 6점
로버트 A. 하인라인 지음, 안정희 옮김/황금가지

 

 

이 소설의 줄거리는 매우 간단하다.

 지구는 범죄자들을 달에 유배시키고, 총독부를 만들어 식량을 공급하는 식민지로 만들었으며 주인공들이 이에 대항하여 달 세계 주민들을 해방시킨다는 내용이다.

 역자는 이 소설이 미국 혁명과 러시아 혁명을 결합시킨 것 같다고 평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소설의 혁명은 미국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 같이 기존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흔드는 혁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총독부의 식민 통치에 대항한다는 점에서 자유라는 이데올로기를 끌어들일 수 있겠지만 애초애 2070년대라는 근미래의 혁명에 이미 다 끝난 18세기 혁명의 이데올로기를 다시 끌어들이는 것은 약간 어색했다. 달을 지배하는 지구가 전제적인 독재 정권을 가지고 있는 디스토피아적 설정이라면 모를까 현대와 비슷한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는 세계관에서 자유를 위해 싸운다는 이야기는 이상하게 들렸다. 

 

 작가는 지구와 달의 관계를 아마 대영제국과 오스트레일리아(혹은 미국)의 관계에서 모티브를 딴 것 같은데 이미 철지난 17세기식 식민주의(대영제국이 오스트레일리아로 넘어간 백인들을 노예부리듯 착취했을까? 작가는 대영제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관계를 가져왔지만 이것만큼은 가져오지 않은 듯하다.)가 갑자기 다시 부활한 것도 너무 어색했다.

 전혀 다른 세상이나 세계를 상정한 것도 아니다. 그저 우리의 지구의 '근미래'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항상 발전할 수는 없다. 퇴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체로 시간이 지나면서 인류는 발전하였고, 만약 퇴보되었다는 설정이 있다면 그에 대한 합당한 설명이 필요하다.

 

 내가 위화감을 느꼈던 것은 세계관 뿐만이 아니었다. 이 이야기의 구성에서도 어색함을 느꼈다. 이 소설은 달의 중앙 컴퓨터인 마크(혹은 미쉘)와 달의 유일한 컴퓨터 기사인 마누엘이 혁명의 가담함으로서 시작된다. 마크 혹은 미쉘은 사실상 달의 네트워크 전체를 지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강력하며 주인공은 달의 유일한 컴퓨터 기사이며, 지구에서 컴퓨터 기사가 오기는 너무 힘들다. 그리고 총독부 관료들은 컴퓨터의 컴자도 모른다... 

 총독부 관료의 비정상적인 무능과 주인공이 300만명의 달 세계 사람들 중 '유일한' 컴퓨터 기사라는 설정은 너무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60년대 소설이라 한들, 상식적으로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 고작 한 명이라니? 아예 왕이 되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나. 게다가 뭐든지 아는 슈퍼 컴퓨터까지 있으니 이야기는 뻔하다. 질량병기 낙하는 신선했지만.

 

 사족을 붙이자면, 사실 하인라인에 대해선 크게 두 가지 의견이 있는데, 하나는 그가 파시스트라는 의견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지상주의자(자유의지론자)라는 것이다. 이 의견들은 동일 인물을 두고 나온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정도로 서로 대립된다. 이 소설 내에서도 그의 두 가지 성향이 모두 드러났다.

 작품 내 달은 자유지상주의라는 그의 사상에 완전히 부합한다. 군대도 공공서비스도 아무것도 없다. 공짜 점심은 없는 것이다. 오로지 시민들의 자유 의지로 국가를 이루는 것이다. 여담으로 역사를 찾아본다면 아니, 잠깐동안 생각해본다면 이 사상이 무슨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그의 파시스트적 성향은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나타난다. 등장인물들은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지만 흑백논리를 내세워 자신에 동조하지 않는 자들에겐 가차없이 적대한다. 또한 반란 계획의 결과로 휴머니즘을 보장하려하지만(다른 것들은 다 부수고, 목숨만 살려주는 것이 휴머니즘이라면) 정작 계획의 수단은 전혀 휴머니즘적이지 않다. 위선적인 정치가들을 비난하지만 정작 자신들도 똑같은 행실을 하고 있다.

 이 모든 행동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닥치고 내 말 들어'이다. 등장인물들은 남의 말은 거의 듣지 않고, 자기 자신만 옳다는 독선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의 사상은 결코 민주적이지 않다. 민주주의를 주장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엘리트주의에 가깝다.

 그가 원하는 것은 대중이 사회를 지배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소수의 사람이 대중을 선동하는 엘리트 독재 혹은 다수 독재의 개념에 가깝다.

 

 이 소설은 두 성향이 놀랍도록 잘 어우러져 있다. 그리고 난 그 정체불명의 복합물이 싫다. 난 기본적으로 신념을 가지지 않는 자를 혐오하지만, 자신의 신념에 회의를 가지지 않는 자는 더욱 혐오한다. 작중 내의 주인공의 사고는 일방통행에 가깝다. 이는 고전 문학에서 나오는 일차원적 성격과는 궤도를 달리한다. 고전 소설의 단순한 영웅은 그야말로 신화와 전설을 진행시켜야 하는 운명에 놓은 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다르다. 운명은 없다. 그저 '자유'가 있다. 그런데 왜 그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가? 자유를 이야기하는 주인공의 말에는 정작 자유가 결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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