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제타이로이

2016. 12. 19. 06:30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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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제타이로이

Pezhetairoi

 

 


 페제타이로이(단수형: 페제타이로스, 그리스어: πεζέταιροι)는 마케도니아 군대와 디아도코이 왕국들의 중추였다. 그들은 글자 그대로 '걷는 동료들'(그리스어로 페조스pezos는 '걷는 전사' 혹은 '보병'이라는 뜻이며 헤타이로스hetairos는 '동료' 혹은 '친구'라는 뜻이다)이었다.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는 주로 페제타이로이로 구성되었다. 페제타이로이는 긴 파이크로 말을 타고 돌진해오는 적을 꿰뚫을 수도, 짧은 무기를 가진 보병을 저지할 수도 있었기에, 적의 기병과 보병 모두 상대하는 데에 효율적이었다.

 


 서술

 페제타이로이는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의 대대였다. 그들은 필리포스 2세의 통치 시기-특히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Battle of Chaeronea)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최초로 명성을 얻었다. '걷는 동료'라는 이름은 필리포스 2세의 계승자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용했던 고대 모병법이었다. 보병들에게 개인적인 '동료'와 '친구'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서, 알렉산드로스는 후에 있을 전쟁에서 각자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바칠 수 있도록 배려하였고, 이로 인해 보다 넓은 인력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아시아를 침공하였을 때에도, 알렉산드로스는 유능한 군사 전술가로서의 명성을 발휘하여, 그 동안 따르고 있던 보병에게 사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당대의 전통적인 모병법보다 더 설득력있는 이유를 들어 많은 현지인을 모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알렉산드로스를 위한 거의 끝없는 인력 기반을 만들어냈고, 소 아시아, 이집트, 페르시아, 인도 등 비용이 많이 드는 원정을 오랫동안 지속시킬 수 있게 하였다.

 그들은 기존의 창보다 더 긴 사리사로 무장하였다. 사리사의 긴 길이로 팔랑크스는 5열까지 창끝을 겨눌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적들은 대항할 전의를 상실함과 동시에 팔랑크스를 거의 뚫지 못하게하였다.

 전술적으로, 페제타이로이는 충격 부대보다는 주로 강력한 방어선으로 쓰였다. 사리사의 길이는 적을 제압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었으나, 기동성이 크게 저하되어 측면이나 후방의 공격에는 거의 대응할 수 없었다. 이는 특히 기원전 331년, 가우가멜라 전투(Battle of Gaugamela)에서 명확해진다. 우익의 급격한 진격으로 페제타이로이 두 대대 사이에 틈이 벌어졌을 때, 적의 기병대가 뚫고 들어왔다. 만일 제2선으로 배치된 호플리테스 예비대가 지휘에 대한 훈련이 부족했더라면 후방 공격으로 괴멸되었을 것이다.

 전투가 고조되었을 때를 제외하면, 페제타이로이와 사리사는 그다지 실용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박트리아(Bactria)와 소그디아나(Sogdia)에서 재무장과 전술을 개조하여 필요하면서도, 일반적인 게릴라 전술을 채택하였을 것이다.

 

 

 아스테타이로이

 아스테타이로이(Asthetairoi, 단수형 아스테타이로스Asthetairos)는 마케도니아 보병의 정예군이었다. 그들은 페제타이로이에서 선발되어 사리사와 아르고스식 방패 그리고 짧은 검으로 무장하였다. 또한 판금 사슬 갑옷과 청동 투구를 갖추고 있었다. 아스테타이로이는 마케도니아 국왕들의 정예 친위병이었다.

 

 

 대대

 페제타이로이 대대들은 최소한 창설될 때에는 한 지역을 기반으로 조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오레스티스/린케스티스(이 대대들는 아마 그 두 지역 사람들을 서로 섞었을 것이다), 엘리미오티스 그리고 팀파이아라는 지역명을 가진 대대가 전해지고 있다. 만약 모든 페제타이로이가 상(上) 마케도니아에서 시작되었다면, 에오르다이아와 펠라고니아를 대표하는 다른 대대들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제타이로이 6개 대대와 함께 아시아로 건너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원전 327년, 군대가 인도에 진입하자 7개의 대대가 추가되었다.

  • 이수스 전투(Battle of Issus)에서의 대대는 다음과 같다(우측에서 좌측으로): 코이노스, 페르디카스, 크라테로스, 멜레아그로스, 프톨레마이오스Ptolemy (필리포스를 대체), 아민타스.[2]
  • 가우가멜라 전투(Battle of Gaugamela)에서의 대대는 다음과 같다(우측에서 좌측으로): 코이노스, 페르디카스, 멜레아그로스, 폴리페르콘Polyperchon(프톨레마이오스를 대체), 심미아스Simmias(아민타스를 대신하여 마케도니아에서 신병들을 모집한 사람), 크라테로스.[3]
  • 히다스페스 전투(Battle of the Hydaspes River)는 5개의 대대밖에 참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과 같다(우측에서 좌측으로): 안티게네스Antigenes, 백(白) 클레이토스Clitus the White, 멜레아그로스, 아탈로스Attalus, 고르기아스. 다른 대대들(폴리페르콘과 알케타스Alcetas)은 클레이토스의 지휘 아래에 히다스페스 강의 서안에 남아있었고, 알렉산드로스가 승리했을 때가 되어서야 퇴각하는 인도인들을 추격하기 위해 강을 건넜다. 그러나 이 전투에 대한 가정과 추측들이 너무 많아서 확실하지는 않다.[4]

 


주석

  1. ^ Arrian, Alexander's Anabasis 1.14.2
  2. ^ Arrian, Alexander's Anabasis 2.8.3–4.
  3. ^ Arrian, Alexander's Anabasis 3.11.9–10.
  4. ^ Fuller, pp. 180–199.

참고 문헌

  • F.E. Adcock. The Greek and Macedonian Art of War. California: 1957.
  • J.F.C. Fuller. The Generalship of Alexander the Great. New Jersey: 1960.
  • D. Lonsdale. Alexander, Killer of Men. Alexander the Great and the Macedonian Art of War. London: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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