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랑크스

2017. 1. 2. 00:44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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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랑크스

  Phalanx
 
 
 
 
 
전술의 진화를 촉진시키는 것은 전쟁 자체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팔랑크스 (고대 그리스어: φάλαγξ, 현대 그리스어: φάλαγγα, 복수형 phalanxes, phalanges; 고대 및 현대 그리스어: φάλαγγες, phālanges)는 직사각형의 모양을 한 군대 진형으로, 보통 창, 파이크, 사리사 또는 그와 유사한 무기들로 무장한 중보병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용어는 특히 (그리고 원래) 고대 그리스의 전쟁에서 이 진형의 사용을 묘사하는 데에 사용되었음에도, 고대 그리스 작가들이 장비의 구분 없이 밀집 보병대를 묘사하는 데에 사용되기도 했으며 아리아누스의 저서, 알란족들에 대항하는 대열(Array against the Allans)에서도 자신의 군단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되었다.[1] 그리스 문헌에서 팔랑크스는 전투에서도, 행군에서도, 심지어 숙영할 때도 사용되었을 지도 모르며, 이와 같은 보병 또는 기병의 밀집은 전투 중에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방패를 함께 종군하는 동료를 보호하는 데에 사용하였다. 그들은 하나의 개체로 행진하여 상대방을 압박하였다. 단어 팔랑크스는 그리스 단어 손가락을 의미하는 phalanx에서 유래되었다.

 반면 스파르테 팔랑크스는 좀 더 짧고 다용도로 쓸 수 있는 창을 사용하였으며,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는 알렉산드로스의 명령을 받아 좀 더 길고 무거워서 두 손으로 써야 하는 창, '사리사'를 사용하였다.


 이 용어는 오늘날 독특한 부대나 사단 (예를 들어 로마의 군단병이나 동시대의 서양 군대)을 가리키기 보다는 군 부대의 일반적인 진법에 가리키는 데에 사용된다. 그러므로 팔랑크스는 일정한 전투 능력이나 구성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보병 전체를 포함한 것 또는 전투에서 배치된 독자적인 팔랑크스 진형을 가리킬 것이다.

 역사 속의 많은 창병 부대들이 팔랑크스와 비슷한 진형으로 싸웠을 것이다. 이 단어는 영어에서 '사람들의 무리가 서있거나 서로에게 가까이 가는 것'을 묘사하는 데에 널리 쓰였다.[2] 예로는 '경찰의 팔랑크스a phalanx of police'가 있다.[3]

 그러나 이 문서는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 세계. 그리고 그리스 문명의 영향을 받은 다른 고대 국가들이 사용한 군사적 팔랑크스 진형에 초점을 둘 것이다.

 

 

 

수메르의 팔랑크스 진법. 움마를 정복한 라가시의 에안나툼 왕의 승리를 기념하는 독수리들의 비석의 파편.

 

 팔랑크스와 비슷한 진형에 대한 서술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25세기의 수메르 석판이다. 이 부대들은 창, 투구 그리고 몸 전체를 가릴 수 있는 커다란 방패로 무장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 이집트 보병은 이와 유사한 진법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어 phalanx는 호메로스의 '팔랑크스(φαλαγξ)'에서 전열을 가다듬으면서 싸우는 호플리테스(중장보병)를 묘사할 때 처음 사용되었다. 호메로스는 그 단어를 진형에 기반한 전투와 개인적인 결투를 구별짓기 위해 사용하였다.[4]


 역사가들은 이 그리스 진법과 그 이전의 것의 관계에 대해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방패벽과 창벽의 원리는 역사 속 주요 문명들의 군대 사이에선 거의 보편적이었으며, 그렇기에 그것들의 유사성은 전파되기 보다는 수렴 진화로 기인한 것일 것이다.

 전통적으로 역사가들은 고대 그리스의 호플리테스 팔랑크스의 기원을 기원전 8세기의 스파르테로 추정하고 있었으나, 이는 수정되고 있다. 이 진형은 기원전 7세기, 아르고스 시가 아스피스(호플론으로도 불리는 방패)를 도입한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기에, 그때 창안되었다는 것이 더 그럴듯하기 때문이다.  이는 기원전 650년으로 추정되는 치기 항아리(Chigi vase)에서 아스피스와 창 그리고 파노플리로 무장한 호플리테스가 확인되는 점에서 입증된다. [4]


 다른 가설은 이전에는 그리스 팔랑크스에 적합한 기술이 부족했기에 완전히 발전되지 못했음에도, 그 근원의 일면을 가진 아이디어에서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전의 전쟁에서는 결집의 원리와 병사의 대규모 집단 운용 같은 두 기본 전략이 이미 있었다. 그 때문에, 그리스 팔랑크스가 이전부터 천천히 발전되었던 아이디어의 완성이자 정점이라고 일컬어 질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도시 국가들의 무기와 갑옷이 발전함에 따라 팔랑크스는 보다 정교해지고, 효율적이게 되었다.[5]

 

 

개요

팔랑크스 진형으로 행군하는 그리스의 호플리타이를 복원한 삽화.

 

 그리스의 초기 고전 시대(약 기원전 750-350)의 호플리테스 팔랑크스는 호플리테스를 밀집 대형으로 배치한 진형일 것이다. 호플리테스는 자신들의 방패를 서로 고정할 것이며, 첫 번째 병사 대열은 창을 방패 밖으로 돌출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팔랑크스는 방패벽을 형성하고 다수의 창 끝을 적에 겨누어, 정면 돌격을 하기 힘들게 한다. 이는 병사들이 주어진 시간 동안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한다(최전방의 병사들 보다도).

 팔랑크스 간의 전투는 보통 진형을 유지하기 쉽고, 이점을 얻기 쉬운 평지에서 벌어진다. 거친 지형이나 언덕 지대는 전열을 유지하기 어렵고, 팔랑크스를 제대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결과, 그리스 도시 국가들 간의 전투는 아무 장소에나 벌어지지도, 확실한 전략적 요충지로 제한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전쟁에 돌입한 당사자들은 싸우기에 가장 적합한 지역을 찾는 경우가 많았다.[6]


 팔랑크스는 전장에서의 마지막 몇 미터 동안에는 속도를 냈지만, 보통은 걸으면서 진군했다. 이 느린 접근의 주요 이유 중 하나는 진형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팔랑크스는 적에게 접근하는 도중에 진형이 흐트러지면 쓸모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팔랑크스의 호플리테스가 어떤 이점을 얻기 위해 속도를 낸다면, 그것은 아마 적과의 최초 충돌에서 추진력을 얻기 위함일 것이다.[7] 헤로도토스는 마라톤 전투에서의 그리스인들을 '우리는 그들이 달리는 적들을 향해 돌진했던 최초의 그리스인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많은 역사가들은 이 혁신이 페르시아 궁수들로부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대측은 최전선의 수많은 창과 부딪치게 될 것이다. 이 전투는 최전선 병사들의 용기에 달릴 것이며, 반면 후방의 병사들은 자신들의 방패로 최전선의 병사들이 전선을 유지하도록 압력을 가한다.


 전투에 돌입했을 때, 모든 진형은 적의 진형을 붕괴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할 것이다. 그러므로 두 팔랑크스가 교전하기 시작했을 때, 이 싸움은 본질적으로 밀어내기 시합이 된다.

 이 '물리적 밀어내기 시합' 이론은 고대인들의 자료를 해석하는 데에 가장 널리 받아들여졌다. 빅터 데이비스 핸슨(Victor Davis Hanson) 같은 역사학자들은 이 이론에서 묘사되는 물리적 압박을 촉진할 필요가 없는 예외적인, 사실상 함께 창을 찌르지도 않을 수 있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대열 뒤의 사람들을 설명하기 곤란하다고 언급한다.[8]


 아직 그리스 미술에서는 팔랑크스 밀어내기 시합과 같은 어떠한 것도 묘사되거나, 기록된 적이 없으며, 그 가설은 당대의 자료의 명백한 증거보다는 추측에 기인한 것이다. 그리스 어로 '밀어붙이다'는 영어 단어와 동일한 비유 방식으로 사용되었으며 (예를 들어 수사적인 논쟁의 과정을 묘사하는 데에도 사용되기도 하는 것), 비록 가능하더라도 문학적, 물리적, 적의 압박을 묘사하는 데에 필요하지는 않았다. 요컨대, 이 가설은 학술적으로 해결된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오티스모스(Othismos)를 물리적인 밀어내기 시합으로 정확히 묘사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봤을 때, 개인의 육체적인 힘이 상대편의 한 열을 벌충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깊은 팔랑크스가 항상 교전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얕은 팔랑크스들이 상대를 물리친 예가 수없이 많다.  예를 들어, 기원전 424년의 델리움에서 8열의 아테나이군은 왼쪽 측면에서 25열의 테바이의 진형을 즉각적인 붕괴 없이 물리쳤다.[9] 물리적인 밀어내기 모델로는 8명이 25명의 적수들을 상대하는 것을 전투의 절반은 커녕, 몇 초동안 유지하는 것조차 상상하기 어렵다.


 몇몇 논증들이 물리적 밀어내기 이론가들에 대한 반론의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에이드리언 골즈워디(Adrian Goldsworthy)는 자신의 논설, '오티스모스, 신화와 반론: 호플리테스 전투의 본질'(The Othismos, Myths and Heresies: The nature of Hoplite Battle)에서 물리적 밀어내기 시합 모델은 호플리테스 전투의 평균 전사자들에도, 거대한 진형의 움직임에 대한 실질적인 현실성에도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10] 이 논쟁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아직 풀리지 않고 있다.

 각 개개의 호플리테스는 왼쪽 팔에 자신의 방패를 휴대하여, 자신 뿐만 아니라 왼쪽에 있는 병사까지 보호한다. 이는 팔랑크스의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병사는 오직 몸의 절반 밖에 보호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전투에 돌입한, 상대 측의 팔랑크스들은 이러한 약점을 적의 오른쪽에 겹치려 함으로서 활용할 것이다. 즉, 전투에 돌입한 팔랑크스는 (호플리테스는 동료의 방패 뒤에 있으려 하기에) 오른쪽으로 회전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피하기 위해 보통 가장 숙련된 호플리테스를 팔랑크스의 오른쪽에 배치시킨다. 네메아에서의 스파르테인들 같은 몇몇 집단들은 이 현상을 자신의 이점으로 이용하려고 한다. 이 경우, 팔랑크스는 보통 동맹군으로 구성되어 있는 자신의 왼쪽을 포기하고, 적의 오른쪽을 공략할 것이다. 의외로, 이 전략은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그다지 언급되지 않았기에, 자주 사용된 것 같지는 않다.[11]


 각 대열에는 장교가 있으며, 후열 장교인 오우라고스(ouragos , 후방 장교)는 후방의 질서를 유지한다. 그러므로 팔랑크스는 전체의 이익을 위해 전투의 개인적인 요소를 억제하는 군사 진형의 예라고 할 수 있다. 호플리테스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동료를 신뢰하고, 그 동료를 보호하려고 한다. 이렇게 팔랑크스는 약점만큼 강점도 있다. 그러므로 팔랑크스의 효율성은 호플리테스가 전투에서 얼마만큼 이 진형을 잘 유지시키느냐, 특히 다른 팔랑크스와 교전할 때 얼마만큼 자신의 위치에서 버티느냐에 달려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진형은 구성원을 일부러 가족과 벗에 가깝도록 조직한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동료를 지원할 때 심리적인 동기가 제공되며, 수치심 때문에 퇴각이나 공황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한다.


 더 훈련되고 용감한 군대일 수록 더 자주 승리한다 - 그리스의 다양한 도시 국가들 사이의 전투는 종종 한쪽이 전투 이전에 도망치는 것으로 끝났다. 그리스 단어 디나미스(dynamis)는 "싸우려는 의지"로 호플리테스가 진형을 유지하는 움직임을 표현하였다.

 

 "이제 다른 자들의 옆을 지키는 자들이 싸움에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최전선의 투사들은 덜 죽을 것이며, 후방의 국민들은 안전할 것이다. 그러나 그자들이 두려움에 빠지면 모든 이점들은 사라진다. 그 자가 겁을 먹어 닥친 재앙을 그 누구도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적대적인 전쟁 속의 사람의 뒤에 통탄할 상처를 안겨주는 것이다. 시체가 먼지 속에 놓이는 것만큼이나 창 끝으로 등 뒤의 후방이 타격을 입는 것은 수치스럽다." 튀르타이오스: 튀르타이오스의 전쟁 노래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의 팔랑크스와 후기 헬레니즘 계승 국가들(디아도코이)는 호플리테스 팔랑크스를 발전시켰다. '팔랑기테스'는 더 긴 창으로 사용하였으며 (사리사, 밑에서 서술), 방어구는 가볍게 무장하였다. 사리사는 두 손으로 휘둘러야 했기에 팔랑기테스는 더 작은 방패를 자신의 팔에 묶어서 휴대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는 호플리테스 팔랑크스와 유사한 방식으로 대열을 이룰지라도, 매우 다른 전략적인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 보다 긴 창 길이로 팔랑기타이의 5열 이상이 자신들의 무기를 최전선을 넘겨 돌출시킨다—적군이 긴 거리를 유지하도록 한다.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는 방패벽을 형성하기 어렵지만, 보다 긴 창이 그 단점을 보완한다. 이처럼 팔랑크스 진형은 전투가 밀어내기 시합으로 퇴보할 가능성을 줄이기도 했다.


호플리테스 무장

 각 호플리테스는 자신의 장비를 스스로 준비해야 했다. 가장 기본적인 호플리테스의 무기는 도리(dory)라 불리는 2.4미터 길이의 창이다. 비록 길이가 다양하다고는 하나, 현재 보통 7에서 9피트 길이 (~2.1 - ~2.7m)로 추정된다. 한 손에는 이것을 들고 다른 손에는 호플리테스의 방패를 든다. 창끝은 보통 약간 굽은 나뭇잎 모양인 반면, 창 밑에는 사우로테르, sauroter ('도마뱀 살해자')라 불리는 못이 창을 땅에 고정시키는 데에 사용되었다(그렇기에 그 이름이 되었다). 또한 그것은 창 자루가 부러졌을 때, 두 번째 무기로 쓰이기도 했다. 이는 특히 적군과의 최초 충돌에 참여하는 병사들에게는 일반적인 해결책이었다. 비록 창이 부러지더라도, 호플리테스는 사우로테르로 쉽게 바꿀 수 있었다.[12] 후방 또한 팔랑크스의 진격으로 쓰러진 적들을 끝내기 위해 그것을 두 번째 무기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역사가들 사이에서 호플리테스가 창을 팔 위로 사용했는지, 아니면 팔 밑으로 사용했는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팔 밑으로 사용했을 경우, 찌르기 위력은 경감되지만, 보다 더 능숙하게 쓸 수 있다. 물론 이는 역도 성립한다.

 두 자세의 사용은 상황에 따라 다른 것으로 보인다. 만약 공격이 필요할 경우, 팔 위로 드는 자세는 상대의 방어를 무너뜨리기 쉬울 것이다. 위쪽으로 찌르는 것은 보다 적은 지렛대의 힘으로 인해 방어구에 좀 더 쉽게 막힐 수 있다. 하지만 방어 시에는 팔 밑에 보다 더 많은 충격을 흡수하며, 어깨를 밑의 자루에 '눕힘'으로서 최대한 안정시킬 수 있다. 이는 팔 밑의 자세가 아스피스(aspis)와 도루(doru)가 보다 더 효율적으로 결합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반대로 만약 방패벽이 깨졌을 경우 그리고 전선에서 방패가 동료들의 것과 맞물렸을 때, 팔 위의 자세는 더 효율적일 것이다. 최전방 뒤의 대열의 호플리테스는 확실히 창을 팔 위로 들어서 찌를 것이다. 후방은 자신의 창을 팔 밑으로 들고, 방패의 각도를 높여서 위로 들 것이다. 이는 사출 무기에 효과적인 방어로서, 그들의 공격을 빗겨나가게 한다.


 호플리테스 시대 동안 호플리테스의 무장 기준은 많은 주기적 변화를 겪었다.[13] 고대 호플리테스는 전형적인 청동 흉갑과 뺨까지 보호하는 청동 투구 그리고 정강이 받이와 다른 무장들을 착용하였다. 시간이 지나, 고전 시대가 되면서 흉갑은 잘 쓰이지 않게 되었고 대신, 리넨으로 채운 갑옷을 가죽 끈으로 묶은 혼합물이 대체하였다.[14] 특히 모든 정강이 받이는 비록 중무장 비율이 높았을 때에도 거의 쓰이지 않았으며, 이는 기원전 401년의 크세노폰이 입증하였다.[15]

 이와 같은 변화는 보호와 기동성의 균형을 반영한 것으로, 특히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기병이 좀 더 중요해지면서[16], 호플리테스는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부대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기 시작했다.[17]


 그러나 호플리테스 시대의 끝에서도 청동 갑옷은 몇몇 형태로 남아 있었다. 몇몇 고고학자들은 청동 갑옷이 사실상 섬유를 채운 흉갑보다 직접 타격을 덜 보호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계속 쓰였던 것은 그것을 쓸 여유가 있던 자들의 지위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18] 이 이론들은 우리에게 실용성과 문화적 선호가 항상 연관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사실, 고전 그리스 방언에는 검사를 뜻하는 단어가 없지만, 호플리테스가 휴대하던 짧은 검을 뜻하는 크시포스(xiphos)라는 단어는 있다. 그 짧은 검은 도루가 부서지거나, 잃어버렸을 때 두 번째 무기로 쓰였다. 발굴 현장에서 발견되어 복원시킨 크시포스의 견본은 약 2피트(60cm)였다. 이 검들은 양날이었기에 찌르기도 베기도 가능했다.[19]

 호플리테스는 아스피스(aspis)라 불리는(종종 호플론(hoplon)으로 가리켜지는), 나무로 만들고 청동을 덮어 씌운 원형 방패를 휴대하였는데, 지름이 거의 1미터에 달했다. 이것은 턱에서 무릎까지 덮었으며 매우 무거웠다(8–15 kg). 중간 크기의 방패(사실, 그 시대에게는 컸지만)는 부분적으로 접시 모양으로 만들어질 수 있어, 그 가장 자리가 어깨를 지탱하였다. 이 특성은 특히 후열의 호플리테스에게 매우 중요했다. 반면 전방으로 계속 압박하려는 병사들은 자신의 방패를 짊어지는 부담을 지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형 방패도 단점이 없지 않았다. 비록 기동성, 보호할 수 있는 곡면 그리고 두 개의 끈으로 인한 원형은 방패벽의 윗쪽과 아랫쪽에 틈을 만들었다. 이 틈은 호플리테스의 남은 부분을 창격에 잠재적으로 노출시켰으며, 이는 항상 호플리테스가 최전선을 통제할 때, 고려해야 할 영역이 되었다.[20]

 

 

팔랑기테스 무장

 사리사는 고대 마케도니아 군대가 사용했던 파이크이다. 사리사의 실제 길이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으나 도루의 두 배정도 긴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최소 14피트 (~4.3m)에서 18피트 (~5.5m)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비교하자면, 기병창, 크시스톤(xyston)이 12.5피트 (~3.8m)이다.) 이 파이크의 상당한 길이는 끝에 달아있는 평형추—사리사를 땅에 고정시키는 못으로 균형을 잡는다. 그 긴 길이 때문에 무게와 균형이 차이가 나기에, 사리사는 두 손으로 휘둘러야 한다. 이는 아스피스를 더 이상 사용할 수가 없음을 의미한다. 대신, 팔랑기테스는 더 작은 펠테라는 방패(보통 경무장한 척후병 - 펠타스트(peltasts)를 위해 준비되는)를 왼쪽 팔뚝에 묶는다. 비록 이는 방패벽을 경감시키나, 창의 극단적인 길이가 대부분의 적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막기에 제3열에서 5열까지의 파이크는 모두 최전선 앞을 지탱할 수 있다. 이 파이크는 손 아래로 쥐며, 방패가 병사들의 시야를 가리기 때문에 머리 위로 향한다. 그 때문에 사리사는 모든 것들로 꽉 막혀 있어(땅, 방패 그리고 상대측의 병사들) 철거하기가 상당히 어려우며, 아래를 찌를 때에도 그 길이 때문에 어렵다.

 

팔랑크스의 구조와 조직

 그리스 군대의 기본 전투 요소는 스티코스(stichos, '대열'을 뜻함) 또는 에노모티아(enomotia , '맹세'를 뜯함)로 보통 8~16명으로 조직되며, 한 명의 디모에리테스와 두 명의 데카스테로에(decasteroe, 단수형. 데카스테로스decasteros)가 보좌하는 데카다르코스(decadarchos)가 지휘한다. 로코스는 4개에서 최대 32개의 에노모티아(시대나 도시에 따라 다르기에 불확실하다)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로코스를 지휘하는 로카고스는 초기에는 100명을, 후기 헬레니즘 군대에서는 최대 500명을 지휘했다.

 아스클레피오도토스와 아엘리아누스 타크티쿠스의 군사 해설서에서 단어 로코스는 팔랑크스 내의 부대를 의미할 때 사용하였다고 기록되었다. 한 타크시스taxis (대대, 스파르테에겐 모라mora) 는 500에서 1500명의 가장 큰 표준 호플리테스 진형으로, 스트라테고스(장군, strategos)가 지휘한다. 

 모든 군대에서 개개의 타크시스나 모라의 총합은 장군들의 위원회가 지휘한다. 총사령관은 폴레마르코스 또는 스트라테고스 아우크라토르라고 불렸다.

 

팔랑크스의 전선과 깊이

 호플리테스 팔랑크스는 보통 8명 혹은 그보다 더 깊은 열을 전개하였다.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는 보통 16명의 깊이였고, 때때로 32명의 깊이로 배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목할 만한 극단적인 사례가 있는데, 레욱트라와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테바이의 장군, 에파미논다스는 팔랑크스의 좌익을 정예 호플리테스 50열의 깊이(밑을 보라)로 배치하여 '망치 머리'로 삼았다. 그리고 깊이가 중요하지 않았던 마라톤 전투에서는 팔랑크스가 4열의 깊이를 유지했다.


 팔랑크스의 깊이는 그 순간의 필요와 장군의 계획에 좌우되었다. 반면, 팔랑크스가 행진할 때는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이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에이스 바토스eis bathos 진형 (느슨한, 문자상의 의미는 '깊게')이 채택되었다. 게다가 이것은 최초 전투 진형으로서 우호 부대가 침투나 퇴각을 위해 통과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 상황에서 그 팔랑크스는 평상시보다 두 배의 깊이를 가지며, 각 호플리테스는 1.8~2m (6–7 피트)의 폭을 가지게 된다.


 적의 보병이 접근할 때, 피크네(pycne, pucne로도 쓰임) 진형 (빽빽한 혹은 팽팽한 진형)으로 빠르게 전환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 경우에, 각 병사들의 공간은 절반으로 깎이며(0.9-1m 혹은 3 피트의 폭), 진형은 평상시로 돌아간다. 팔랑크스가 일제 사격이나 기병의 정면 돌격 같은 추가 압력을 받을 때 쓰는 훨씬 더 빽빽한 진형을 시나스피스모스 혹은 수나스피스모스(극도로 팽팽한 혹은 방패로 고정된 진형)라 부른다. 시나스피스모스에서는 열의 깊이가 절반으로 줄어드며, 각 병사들의 폭도 0.45 m (1.5 피트)보다 좁아진다.

 

전투의 단계

 호플리테스 전투 단계는 몇 개로 분류될 수 있다.

 에포도스(Ephodos): 호플리테스는 자신들의 파에아네스(전쟁 찬가)를 부르는 것을 멈추고, 서서히 가속도와 보폭을 올리면서 적을 향해 나아간다. 그 순간 직전에 강렬한 함성(알라라그모에, 단수형. 알라라그모스)이 나올 수 있다. 유명한 함성은 아테나이의 (elelelelef! elelelelef!)와 마케도니아의 (alalalalai! alalalalai!) 알라라그모에다.

 크로우시스(Krousis): 반대측 팔랑크스와 서로 일제히 전선을 거의 마주한다. 프로마코에(promachoe, 선봉)은 이 충돌에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살아남는 것과 유지되는 데에 적합해야만 한다.

 도라티스모스(Doratismos): 적의 진형을 무너뜨리기 위해 창을 빠르게 찌르는 것을 반복한다.

 오티스모스(Othismos): 문자상으로는 '밀어내기'. 창 대부분이 부러졌을 때, 호플리테스는 자신의 큰 방패와 두 번째 무기인 검을 들고 밀어붙이기 시작한다. 가장 긴 단계가 될 수 있다.

 파라르헤크시스(Pararrhexis): '침입'. 상대 팔랑크스, 적의 진형은 흩어지고 전투는 끝난다.

 

전술

위: 간단하게 도식화한 전통적인 호플리타이 전투 대열과 진군(붉은 곳이 정예군).
아래: 에파미논다스 지휘 아래의 테바이인들이 사용했던 사선진. 강력한 좌익이 진군하는 반면, 약한 우익은 후퇴하거나 움직이지 않는다.
  기원전 371년, 레욱트라 전투의 군사 배치.

 

 팔랑크스의 초기 역사는 주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경쟁으로 인한 호플리테스의 전투 중 하나였다. 그 결과는 언제나 서로 견고한 진형을 갖추어 어느 한 쪽이 붕괴될 때까지 밀어내는 것으로 거의 동일했다. 팔랑크스가 좀 더 많은 것을 이룰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마라톤 전투(기원전 490년)에서 입증되었다. 다리우스 1세의 거대한 군대에 마주한 아테나이인들은 자신의 팔랑크스를 얇게 폈기에, 전선이 길어져 포위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페르시아 경보병은 깊이가 줄어든 팔랑크스를 저지할 수 없었다. 페르시아의 양익을 격파한 아테나이 양익의 호플리테스는 안쪽으로 나아가 페르시아의 중앙부의 정예 부대를 패배시켰다. 이 전투의 결과는 아테나이의 승리였다. 페르시아 전쟁 동안 호플리테스 팔랑크스는 페르시아 보병보다 우수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예를 들면 테르모필레와 플라타이아이 전투)


 가장 유명한 팔랑크스 진화의 예는 레욱트라 전투에서 만들어진 사선진일 것이다. 테바이의 장군, 에파미논다스는 자신의 팔랑크스의 우측과 중앙을 얇게 하고, 좌측을 50명의 깊이로 하는 전례가 없는 전술을 사용했다. 그렇게 하여, 에파미논다스는 팔랑크스의 우측이 가장 강하다는 전례를 뒤집은 것이다. 이는 테바이인들이 상대 팔랑크스의 우측에 있던 정예 스파르테군을 압도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반면, 테바이의 중앙과 우측의 전선은 상대 팔랑크스로부터 물러나고, 교전이 시작되었을 때, 진형의 약한 부분을 지킨다. 스파르테 우익이 테바이 좌익에게 한번 격파당하기 시작하면, 스파르테 전선의 나머지도 붕괴된다. 그러므로 호플리테스의 공격력의 위치를 알아냄으로서, 에파미논다스는 적의 고정관념을 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는 테바이에서 인질로 몇 년동안 있었을 때, 에파미논다스의 혁신에 관심을 가졌다. 본국으로 귀환한 그는 혁명적인 새로운 보병을 창설하여 그리스 세계의 주역을 변화시켰다. 필리포스의 팔랑기테스는 스파르테를 제외한 고대 그리스의 첫 번째 직업 군인이었다. 그들은 긴 창으로 무장했으며, 더 발전되고 철저한 복잡한 전술과 작전 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필리포스의 팔랑크스는 산병의 일종과 기병, 특히 헤타이로이를 포함한 다면체의 일부였다. 마케도니아 팔랑크스가 적의 전선의 중앙을 찌르는 동안 기병과 좀 더 기동성있는 보병은 적의 측면을 공격한다.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마주한 이 좀 더 전술적인 군대의 우위는 필리포스 2세의 군대가 테바이와 아테나이 팔랑크스 동맹군을 궤멸시킨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드러난다.

 

약점

 호플리테스 팔랑크스는 다른 지원 부대 없이, 좀 더 기동성 있고 유연한 적군을 만날 때 가장 약하다. 이피크라테스가 이끄는 아테나이 군대가 스파르테의 모라(500명에서 900명 사이의 부대)를 패배시킨 레카에움 전투(Battle of Lechaeum)가 이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테나이 군은 투창과 활로 무장한 경무장 부대의 비율이 상당했으며, 공격을 계속하여 스파르테 군을 약화시켜 전열을 흩뜨렸다. 결국 스파르테인들은 배로 도망치려 하다가 아테나이 중보병에 결국 궤멸되었다.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는 이전의 호플리테스와 유사한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론적으로 정면은 쉽게 돌파하기 힘드나 측면과 후방은 매우 취약하다. 또한, 교전을 시작하면 그 방향에서 위협을 마주하더라도 철수하거나 재배치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팔랑크스는 비(非)팔랑기테스 진형에 마주했을 때 그 측면들을 보호할 것이 필요하다—더 가볍거나 최소한 더 기동성있는 보병, 기병, 등등. 이는 셀레우코스의 지원 보병이 밀려나자, 팔랑크스가 로마 군과의 싸움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던 마그네시아 전투(Battle of Magnesia)에서 입증된다.


 마케도니아 팔랑크스 또한 주변에 적합한 합동 조직이 없거나 험한 지형을 통과할 때 조직력을 잃을 수 있다. 개인적인 구역과 대열 사이에 차이가 생기면 하위 부대 내에서의 견고한 전선과 대열의 다른 부분이 결집되기 어려워진다.[21] 퀴노스케팔라이 전투와 퓌드나 전투 같은 사건들에서 팔랑크스는 좀 더 유연한 군대—로마 군단병의 공격에 취약했다. 그들은 사리사를 피할 수 있었고, 팔랑기테스와 백병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호플리테스의 물리적 경향의 측면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팔랑크스의 강점은 자신의 최전선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있으며, 최전열의 쓰러진 병사들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대체하는 것이 중요했다. 만약 어떤 팔랑크스가 이 규칙을 확립하는 데에 실패한다면, 다른 팔랑크스가 전선을 돌파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기에, 빠른 패배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전선에 가까운 호플리테스는 쓰러진 동료들을 대체할 정신적인 준비를 해야 했으며, 자신의 새로운 위치를 전선의 조직을 무너뜨리지 않고 적응해야 했다.[12]


 마지막으로, 팔랑크스 중앙의 군사 대부분은 사다리꼴로 전개하여 전투의 주요 전선을 지원하려는 경향이 적다. 이는 전열을 깨는 것이며, 종종 전개된 측면 중 하나가 확고한 승리를 위태롭게 하기 때문이다.

 

쇠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이 정점에 다다른 후, 군사 진형으로서의 팔랑크스는 마케도니아 후계 국가들의 쇠퇴를 반영하는 듯 느리게 쇠퇴하였다.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아버지가 사용했던 혼성군 전략은 좀 더 단순한 호플리테스 팔랑크스의 전면 충격 전략으로 점차 회귀했다.


 디아도코이와 팔랑크스의 쇠퇴는 기원전 3세기의 로마 공화정의 부흥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로마 공화정의 형성 이전, 로마인들은 팔랑크스를 그대로 사용하였으나[22] 서서히 좀 더 유연한 전략을 발전시켰고, 그 결과 중기 로마 공화정 때, 3열 군단을 탄생시켰다. 팔랑크스는 로마인들에게 제3열이나 하스타에(hastae) 혹은 창으로 무장한 베테랑의 트리아리를 위한 전략으로 남아있었다.[23] 결국, 로마는 마케도니아 후계 국가와 다양한 그리스 도시 국가와 동맹의 대부분을 정복하였다. 이 영토들은 로마 공화정에 합병되었으며, 헬레니즘 국가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기에 전통적인 팔랑크스 진형을 쓰는 군대도 없어졌다. 그 후, 그 지역에는 로마식 전열과 장비를 무장한 군대가 생겨났다.


 그러나, 군사 전술로서의 팔랑크스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팔랑크스가 사실상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는 지에 대하여 몇몇 의문이 있다. 로마군과 헬레니즘 팔랑크스 사이의 몇몇 주요 전투―퓌드나(Pydna (168 BC)), 퀴노스케팔라이(Cynoscephalae (197 BC))와 마그네시아(Magnesia (190 BC))에서 팔랑크스는 로마군에 상대적으로 잘 싸웠고, 초기에는 로마 보병을 물리치기도 했다. 그러나, 퀴노스케팔라이와 마그네시아에서 팔랑크스는 측면을 방어하는 데에 실패하였고, 결국 패배하였다. 반면, 퓌드나에서는 로마 병사들을 추격하면서 팔랑크스의 응집력이 상실되었고, 이는 로마인들이 진형을 관통할 수 있게 하였다. 후반의 밀집 전투 기술이 결정적이었던 셈이다.


 안정된 화기가 개발되기까지 많은 군대 내에서 창으로 무장한 부대는 중요한 요소였으나, 팔랑크스 형식으로 싸울 필요는 없었다. 그러므로 비교를 하려면 고전 팔랑크스와 중세 후기 파이크 진형(pike formations)을 서로 비교해야 의미가 있을 것이다.

 중세 시대와 르네상스 저지대(Low Countries, 근대 네덜란드와 벨기에) 도시 국가들, 스위스의 칸톤 그리고 북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에서 특정한 평행을 볼 수 있다. 저지대의 군대는 먼저 창으로 무장하다가 파이크로 바꾸었으며, 14세기에 부르고뉴 군과 프랑스를 무찔렀다. 14세기의 스위스는 핼버드를 먼저 썼으나—랜스로 무장한 오스트리아 기병에게 거리가 닿지 않자—15세기 후반, 점차 파이크를 쓰기 시작했다. 부르고뉴 전쟁의 스위스 파이크 팔랑크스는 역동적이고 호전적이었으며, 용담공 샤를의 죽음과 '근세' 부르고뉴 군대의 파멸을 가져다 주었다. 이 승리는 스위스 군사 전문가들이 고전 문헌을 읽고 헬레니즘 관습을 의식적으로 모방하도록 유혹하였다. 15세기와 16세기의 몇몇 이탈리아 국가들은 자신이 고용한 스위스 용병과 비슷한 파이크 부대를 양성하였다. 또한 독일의 란츠크네흐트(Landsknechts)가 스위스를 모방하여 두 용병 부대 사이에 적개심과 쓰라림이 생겨났다.


 군사 역사가들은 스코틀랜드, 특히 윌리엄 월리스(William Wallace)와 로버트 1세(Robert the Bruce) 치하에서 스코틀랜드인들은 헬레니즘 팔랑크스를 의식적으로 모방하여 '고슴도치' 혹은 스킬트론(schiltron)을 만들었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는 중세 초기, 스코틀랜드의 픽트족과 다른 부족들이 장창을 썼다는 가능성을 무시하고 있다. 장창 전술(북 웨일즈에서도 발견되었던)은 1066년 이전에, 브리튼 섬의 일부에서 벌어진 불규칙적인 전쟁의 일부를 담당했을 가능성도 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확실히 프랑스의 파이크와 역동적인 전술을 수입하였고, 플로든 전투(Battle of Flodden Field)에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스코틀랜드인들은 효율적인 경포(輕砲)로 인해 전열에 구멍이 생겼으며, 그들의 팔랑크스는 무질서해져 진격하기 어려웠다. 결국 남겨진 그들은 손 쉬운 먹이감이 되었기에, 잉글랜드 장궁병이 가까운 거리에서 사격했으나 빌즈(bills)라 불리던 폴암이 더 효율적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당대 자료에서 빌즈가 스코틀랜드의 파이크의 머리를 잘랐다는 묘사를 찾아 번역하였다.


 장창과 총기(Pike and shot)는 16세기와 17세기의 군사 표준이 되었다. 총검의 발달로 인해 파이크는 18세기 초기의 블렌하임 전투(Battle of Blenheim) 이후, 더 이상 주요하게 쓰이지 않았으며 서유럽 군대에서 급속히 사라졌다. 연대기(旗) 근위병들 사이에서 소수의 파이크나 절반 길이의 파이크 그리고 아주 적은 핼버드를 계속 사용하였으나, 이것도 나폴레옹 시대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파이크는 남북전쟁 시기에서 남부군이 잠시동안 무기로 사용하려 했고, 심지어 몇 개가 제조되었으나나 거의 쓰이지 않았다.

 

더 읽기

참조

  • Goldsworthy, Adrian: In the Name of Rome: The Men Who Won the Roman Empire (Orion,2003) ISBN 0-7538-1789-6
  • Goldsworthy, A. (1997) "The Othismos, Myths and Heresies: The Nature of Hoplite Battle", War In History 4/1, pp. 1–26
  • Hanson, V. (1989) "The Western Way of War" (Hodder & Stoughton)
  • Lazenby, J.F. "The Pelopennesian War - A Military Study", (2004) Routledge
  • Lendon, J.E., Soldiers & Ghosts: A History of Battle in Classical Antiquity, Yale University Press (2005), ISBN 0-300-11979-8, 9780300119794 Book Review
  • Wees, Hans van, (2004) Greek warfare :Myths and Realities (Duckworth Press)
  • Xenophon, (1986) Translated by George Cawkwell, The Persian Expedition (Penguin Classics)

각주

  1. ^ Arrian, Array against the Allans
  2. ^ Oxford English Dictionary
  3. ^ Arrests, fights, jeering: Olympic spirit flickers amid the chaos | Sport | The Guardian
  4. ^ a b Phalanx and hoplites
  5. ^ Victor Davis Hanson, Hoplites: The Classical Greek Battle Experience. 1991. p. 66-67
  6. ^ Victor Davis Hanson, Hoplites: The Classical Greek Battle Experience. 1991. p. 88-89
  7. ^ Victor Davis Hanson, Hoplites: The Classical Greek Battle Experience. 1991. p. 90-91
  8. ^ See Hanson,(1989) Chap 15, For an introduction to the debate
  9. ^ Lazenby, (2004) p.89
  10. ^ Goldsworthy (1997) pp.1-26 in academic journal "War in History"
  11. ^ Victor Davis Hanson, Hoplites: The Classical Greek Battle Experience. 1991. p. 91-92
  12. ^ a b Victor Davis Hanson, Hoplites: The Classical Greek Battle Experience. 1991.
  13. ^ See Wees (2004) pp.156-178 for a discussion about archaeological evidence for hoplite armour and its eventual transformation
  14. ^ Wees (2004) p.165
  15. ^ Xenophon, (1986) p.184
  16. ^ See Lazenby (2004) pp.149-153, in relation to the deprivations of Cyracusian Cavalry and counter-methods
  17. ^ See Xenophon (1986) pp.157-161 "The Greeks Suffer From Slings and Arrows", and the methods improvised to solve this problem
  18. ^ Wees (2004) p.189
  19. ^ Victor Davis Hanson, Hoplites: The Classical Greek Battle Experience. 1991. p. 25
  20. ^ Victor Davis Hanson, Hoplites: The Classical Greek Battle Experience. 1991. p. 68-69
  21. ^ Goldsworthy, p.102
  22. ^ Lendon, J.E., Soldiers & Ghosts: A History of Battle in Classical Antiquity, Yale University Press (2005), ISBN 0-300-11979-8, 9780300119794, p. 182: The phalanx was known to the Romans in pre-Republic days, whose best fighting men were armed as hoplites.
  23. ^ Lendon, J.E., Soldiers & Ghosts: A History of Battle in Classical Antiquity, Yale University Press (2005), ISBN 0-300-11979-8, 9780300119794, pp. 182-183

외부 링크

 

출처

본문 :http://en.wikipedia.org/wiki/Phalanx_formation 전문 번역

사진 : http://www.mlahanas.de/Greeks/WarTech.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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