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드]리갈 하이(2012~2014) - 법치주의에 대하여

2017. 3. 6. 07:58감상/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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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드라마, 코미디

제작사: 후지테레비


리갈 하이는 내가 가장 인상깊게 본 일본 드라마 중 하나다. 

법정을 주제로 담고 있으면서도, 기존의 수사물과는 다른 메세지와 연출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보통 경찰, 법정, 민간 수사를 다루는 미디어는 '공정함'과 '정의'를 내세운다. 악한 자들로부터 선량한 피해자를 보호하고, 또는 억울한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서 주인공들은 모든 힘을 악당의 처벌에 쏟아 붓는다. 이는 악당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것의 해악을 없애는 것이 당연하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작은 다르다. 일단 본작의 주인공인, 코미카도부터 악당이다... 

자신의 심복을 시켜 다른 사람의 신상을 캐는가 한편,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막기 위해 돈을 내거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보통 통용되는 윤리로는 이러한 모습이 인정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도 처음에는 이 드라마가 악인을 주제로하는 피카레스크가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코미카도의 노골적인 졸부 근성과 기존 윤리에 대한 반항은 다분히 의도된 것이었다.

본작품은 기본적으로 보편타당한 정의나 진실을 상정하지 않는다. 이는 작중 내에서도 코미카도의 언행으로 몇 번이고 직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법정 내에서는 오로지 그동안 갖추어진 증거와 법률 해석 그리고 법적 논리의 입증만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 법학에서 따르고 있는 논리다. 고대에는 각 개인의 마음에 따라 법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에 의한 지배, 즉 인치人治였다.

인치는 명군과 성군의 치하에서는 그 빛을 발했지만, 암군과 폭군의 치하에서는 그 무능함이 여실없이 드러났다.

 또한 점차 인구가 증가하고, 관리해야 할 행정적 영역 그리고 통치에 필요한 여러 분야의 기술과 지식이 폭증하면서 한 개인이 사회 전체를 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또한 인치 특유의 비일관성도 문제였다.


그래서 근대주의자들은 법치주의를 탄생시켰다. 

사람의 주관성에 판단하지 말고, 법이라는 객관적 기준을 토대로 판례를 통해 일관성을 확보한다는 취지였다.

법에 의한 지배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법정은 누구 하나를 편들어주고 시작하는 장소가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해주기를 원한다.

감정적인 동기에서, 정치적인 동기에서, 경제적인 동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떼'를 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은 그 자체로 나이브한 생각이 아닐까.



작중 내에서는 크게 두 변호사를 내세우고 있다.

주인공인 코미카도 켄스케(사카이 마사토)와 마유즈미 마치코(아라가키 유이)다.

두 주인공은 성향이 정반대로, 코미카도 켄스케는 법정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뭐든지 하는 비열한 인물로 의뢰인의 목적에 따라서 승리하는 것만 생각한다.

반면, 마유즈미 마치코는 법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존재하며 그것을 실현하는 것만 생각한다.


모든 것이 대조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사건들이 이 드라마의 포인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코미카도가 압승하게 되면서, 이 드라마의 주제가 분명해진다.

코미카도와 마유즈미 모두 비현실적인 캐릭터이다. 한 명은 승리를 위해, 법을 어기는 변호사이고, 다른 하나는 진실을 위해 의뢰인을 패대기치는 변호사이다.

한 명은 자신의 무패기록이라는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유아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다른 한 명은 없는 진실을 자꾸 찾으려는 순진한 모습을 보여준다.


둘 중 어느 것이 옳냐고 하면, 당연히 둘 다 틀리다. 

한 인간은 법조인 주제에 법을 수시로 어기고, 한 인간은 의뢰는 내팽개치고 자기 좋을 대로만 행동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 변호사답냐고 하면, 당연히 코미카도다.

왜냐하면 마유즈미는 변호사의 기본적인 소양 자체를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서 불리한 증거를 들이대고, 의뢰인의 이익을 해하는 짓을 서슴지 않는다.

코미카도의 여러 불법 행위와 각종 어그로는 극적 과장으로 넘어갈 수는 있어도, 마유즈미의 이러한 행동 기제는 완전한 자격 미달이다.

극중에서도 코미카도가 마유즈미의 이러한 면을 계속해서 공격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드라마의 과장된 상황과 명연기 속에는 법치주의에 대한 주제의식이 깔려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점에서 리갈 하이에 매력을 느꼈다.

당연한 정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한 정의가 있다고 주장하는 의견만 있을 뿐이다.

그 두 가지를 착각하는 한, 마유즈미와 같은 덫에 빠지게 된다. 

있지도 않은 정의를 찾아 헤매다가 결국, 자신이 생각하던 정의와 다른 추악한 면을 보았을 때 멘붕하는 모습.


당연한 정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정의를 말하고 싶다면, 그 실체에 대해서 증명하고 설득해야 한다.

그 지극히 단순한 원리조차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의 말은 아무런 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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