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의 미로(2006) - 잔혹한 동화

2017. 3. 20. 22:36감상/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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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
장르: 판타지/드라마
배우: 이바나 바케로, 세르지 로페즈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는 아마 2000년대에서 가장 극찬을 받은 판타지 영화들 중 하나일 것이다. 원제는 단순히 판의 미로일뿐인데, 어째서인지 한국에서는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라는 부제를 붙였다. 아마 배급사가 가족 판타지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서 이런 사기(?)를 친 것 같은데, 완벽한 실패였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꿈과 희망이 넘쳐나는 장미빛 판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둠이 내린 까만 밤 속 희미하게 내리는 달빛과도 같은 음울하면서도 아름다운 환상이다. 때문에 실제로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잘못된 마케팅으로 이 영화를 반지의 제왕처럼 쾌활한 분위기일 것이라 착각했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

요정이 산 채로 뜯겨나가며, 눈이 없는 기괴한 괴물, 살갗이 찢겨나가는 얼굴...


판의 미로의 판타지는 현실을 죽이지 않는다. 단지 현실을 또 다른 차원으로 왜곡하여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뿐이다.

'판타지는 현실의 극한적 왜곡이다'라는 J.R.R 톨킨의 명언을 되새겨보는 순간이다.





작 중 주인공, 오필리아는 자신의 어머니 카르멘과 함께 새 아버지인 비달 대위의 병영으로 이사하게 된다.

그 길에서 그녀는 '요정'을 보게되면서 마침내 환상과 현실이 맞닿게 된다.

비달은 엄격하고 가부장적인 인물로 거수자로 체포된 농부 부자를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바로 처형시켜버리는 잔인한 인물이다.

한편, 병영에 도착한 오필리아는 이전에 보았던 요정에 이끌려 '판의 미로'라는 옛 유적에 도착하게 되고 자신이 지하 세계의 공주이며 그곳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여러 시련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톱니바퀴로 가득한 그의 방, 간간이 새어나오는 빛으로만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칙칙한 풍경은 비달 대위의 비인간성을 상징하고 있다.



이 순간부터 영화의 내용은 지하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오필리아의 시련과 공화파와 왕당파가 대립하는 스페인 내전, 환상과 현실, 문명과 비문명으로 이원화된다.

오필리아는 마법의 돌로 나무를 썩게 하는 개구리를 제거하고, 아이를 잡아먹는 괴물의 방에서 칼을 탈취해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전투는 점차 심화되며, 카르멘은 아이를 낳다가 결국 사망하게 된다.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파시스트의 현장에서 오필리아는 자신이 공주라는 환상 속에서 살아간다. 영화는 그녀의 환상이 정말로 환상인지, 아니면 망상인지 확실한 답을 하지 않는다.



1931년 수립된 스페인 제2공화국은 세계 역사에서 가장 치열한 현장 중 하나였다. 이 신생 공화국에서는 당시에 존재했던 모든 사상이 교차하고 있었다.

민주주의, 군주제, 독재정, 공산주의, 자본주의, 사회민주주의, 시장자유주의, 카톨릭, 무신론, 반동주의, 중도파, 아나키즘, 보수주의, 파시즘, 생디칼리즘.....

제2공화국은 노동자의 공화국으로서 수백년에 걸쳐 이어져 내려온 스페인 지배층의 기득권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졌다.

그리고 이러한 민심에 반역을 일으킨 군부는 가톨릭 교회와 왕정주의자들, 전통주의자들, 팔랑헤와 손을 잡고 민주정부를 무너뜨린 것이다.


형제가 형제를 죽이고, 가족이 가족을 죽이는 끔찍한 슬픔이 스페인 전역에서 퍼져나갔다.

민주정부가 파시스트의 지원을 받은 국민군에게 무너져가는 와중에도,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민주주의 정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2공화국을 도운 것은 대서양 너머의 멕시코와 엄청난 양의 금을 요구한 소비에트 연방뿐이었다.



팔랑헤 문장이 그려진 부대 차량. 이 영화를 감상하는 데에 있어서 시대적 배경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면, 판의 미로라는 영화가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 나에게는 오필리아의 환상이 진짜냐, 가짜냐라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오필리아가 현실을 도피하고 환상에 집착하게 되는 그 시대적 상황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현실과 환상의 두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문제는 그 어느 쪽도 썩 좋아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환상 속의 시련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구역질나는 벌레 소굴, 끔찍한 괴물로부터의 도주, 자신의 핏방울을 먹여야하는 인간모양의 식물...

정말로 저것이 현실을 버릴 가치가 있는 환상인지에 대한 의문마저 들 정도이다.

때문에 나는 오필리아의 이야기를 보면서, 계속 스페인 내전을 떠올랐다. 아이를 잡아먹는 괴물의 그림에서는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가 왠지 모르게 떠올랐다.

오필리아가 강박증을 가지면서 빠져드는 환상은 사실 또 다른 현실의 은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어떤 뚜렷한 근거는 없지만 막연하게 떠올랐다.



나에게 있어 이 영화는 환상이라는 개념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보통 환상이라하면, 아름다운 요정이 나오거나 혹은 장엄한 배경, 위엄있는 영웅들이 악과 싸우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 이 영화는 마치 환상이 어떻게든 한 차례 비틀려서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마치, 첫번째 시련의 보석과 개구리는 끊임없이 자본을 갈구하는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것 같고,

두번째 시련의 눈 없는 괴물은 지성이라는 두 눈이 제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에 박혀있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진실이나 정의보다는, 순간순간의 이해관계에 얽매여 곡학아세를 하는 반지성주의를 상진하는 것 같다.


물론 나의 억지 추리이며, 그저 내가 이런 느낌을 받았다는 것 뿐이다.

이 영화 속의 잔혹한 환상은 현실이라는 재앙 속에서 구원해주지 않는다. 

마치 구원해줄 것처럼 독을 퍼뜨리지만, 결국 오필리아는 총에 맞은 채로 이승을 하직하게 된다. 

그녀가 지하세계의 왕국에 간 후로, 사망하는 씬이 나오니 사실상 구원은 없다고 확정한 셈이다.


나에게는 이러한 구성이 환상에 기대지 말고, 오히려 환상 속에서 현실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메시지로 읽혔다.

어찌되었건 꽤 재밌는 영화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추천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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