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택트(2017) - 그래서 뭐?

2017. 2. 11. 15:12감상/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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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SF, 드라마

감독: 드뇌 빌뇌브

배우: 에이미 애덤스, 제레미 레너



컨택트, 사실 원제는 어라이벌Arrival이다. 대체 왜 굳이 제목을 뜯어 고쳐서 개봉했는지(차라리 뜯어 고칠려면 원작 '네 인생의 이야기'가 백배는 더 나았을 것이다) 모르겠다.

사실, 테드 창의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는 SF계에서는 매우 유명한 작품이었다. 작품집의 소설들 하나 하나가 SF의 현대성과 기술적 측면, 현학적 측면을 잘 살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사회 문제(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문명의 기원(바빌론의 탑), 종교적 기적(지옥은 신의 부재) 등의 인문학적 주제를 혁신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아마 소설 발매 때부터 영화화 이야기가 돌았던 것 같은데, 무려 약 십 년이 지나서야 그게 실현되니 참 오묘한 감정이 느껴진다. 격세지감이라는 것이 이런 걸까.



원작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는 인식론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 내의 인류와 헵타포드는 두 개의 상반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

가령 헵타포드는 인간이 끊임없이 연구한 물리학적 속성을 기본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속도라는 아주 기본적인 관념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소설은 이 차이를 페르마의 원리를 통해서 설명한다. 빛이 두 지점 사이를 지나는 경우, 최소 시간이 도달하는 경로로 진행한다는 내용이다.


문제는 빛이 물로 들어갈 때이다. 물로 들어갈 때에는 굴절각이 형성되어 진로 방향이 바뀌는데, 이 때문에 두 지점간의 진행 거리는 단순히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더 길게 된다. 하지만 빛은 물에 들어갈 때, 일직선으로 '최소 거리'로 진행하는 것보다 굴절하여 진행하는 것이 결국 '최소 시간'으로 도달하는 데에 유리하다.


이러한 현상에 인간은 인과적 인식에 기대어 빛의 굴절이 '가장 빠른 방향으로 이동하기 위해 그렇게 굴절한다'고 받아들이기 쉽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에는 빛이 처음부터 자신의 경로를 검토하고 계산해야 한다는 맹점이 있다. 합목적적 현상을 인과적으로 받아들였을 때 생기는 오류인 것이다.


하지만 헵타포드는 이러한 인과적 인식이 아닌, 동시적인 인식을 가져 모든 사건을 한번에 경험하고 그 근원에 깔린 하나의 목적을 지각한다.

때문에 사건의 '순서'는 중요하지 않으며, 가로 혹은 세로로 이어서 쓰는 문자는 그들의 전체적 의식 흐름을 오히려 방해하게 된다.


인과론과 목적론, 동전의 양면과 같은 세계관 중 그 어느 것이 더 우월하지 않다.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헵타포드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아이'라는 미래를 스스로 만들어 간다. 하지만 이것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자유'가 아니다.

왜냐하면 미래(목적)을 안 시점부터, 그것의 성취를 선택한다는 것은 곧 미래를 안다는 것을 포기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압도, 자유도 아닌 그저 하나의 합목적적 현상인 것이다.


만약 의식적으로 선택하게 된다면, 빛이 '스스로' 생각하면서 다른 방향으로 굴절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게 된다. 결국 '최소 거리'에 도달하지 못하게 된다.

'네 인생의 이야기'라는 제목부터가 이미 '굴절'을 상징하고 있다.



나는 솔직히 네 인생의 이야기가 영화화된다고 했을 때, 많이 걱정했다.

왜냐하면 이런 류의 소설은 영화화되면 대체로 다운그레이드 되기 때문이다. 문자로서 서술되는 것과 단순 시각으로서 서술되는 것은 필연적으로 차이가 있다.

이 경우 가장 큰 문제는 글을 통해서 그 내용을 독자가 온전하게 혹은 그 이상을 얻을 수 있는 문자 매체는 그 자체가 완벽하다는 점이다. 

그것을 영상이라는 형태로 가공하는 것은 일종의 도박과도 같다.

제작진은 어떻게든 내용의 요점과 플롯을 정확하게 집어내어 반드시 그 이상을 만들거나 동등하게 만들어 내야 한다.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싱거운 결과물이 탄생해버려서, 결국 망해버리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을 받았고, 로튼 토마토 등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이 영화를 보면서 재미있다고 생각이 든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마지막 엔딩까지 보면서 든 생각은 어쩌라고?????였다.


원작을 끔찍하게 사랑했던 내가 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그 원인을 생각해보니, 다음과 같은 요인들 때문인 것 같다.



첫째, 실패한 긴장 조장

앞서 말했던 것처럼 네 인생의 이야기는 인식론을 다룬 현학적인 소설이다. 즉, 태생부터 아는 사람만, 이런 류에 관심있는 사람만 좋아할 이야기인 것이다.

외계인이 침공해서 뭔가가 박살나고, 국가적 위기가 터지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냥 외계인의 언어를 해독하고, 한 개인이 그 세계관을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영화는 원작의 이런 소박함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판을 키웠다.

중국과 러시아가 외계인에 전쟁을 선포한다던지, 폭동이 일어난다던지 등등등..

전투 씬이나 다른 긴장감이 높아질 씬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계속 강조하는 점이 너무 마음에 안 들었다.

마치 이거 해결 못하면 인류가 끝난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전혀 그래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원작 요소 삭제

영화는 단 1~2 시간 만에 모든 내용을 끝마쳐야 한다. 때문에 모든 내용이 들어갈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뭐랄까, 원작을 원작답게 하는 요소들을 다 빼먹은 느낌이 든다.

인간과 헵타포드의 세계관을 단지 한 두마디의 단어로 언급하고 끝내버린다.

헵타포드 언어의 연구도 관객들이 지루해할까봐 대충대충 진행한다.

애초에 그것을 규명하고, 탐구하는 과정 자체가 이 소설의 메인 플롯인데도 말이다!

때문에 주인공은 전~혀 고생을 안 해보이는 것처럼 보인다. 머리를 안 쓴다는 말이다. 

언어학에서는 이제 퇴물이 되어가는 사피어-워프 가설까지 언급하지만, 전혀 설득력이 없다.

주인공이 이룬 업적이 전혀 머리로, 심장으로 와닿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재미도 없고 카타르시스도 없다.

원작 소설은 애초에 헵타포드 B의 규명을 과학적 이론을 빗대어 설명하기 때문에 매우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테드 창 특유의 수려한 문체로 독자는 지루할 틈이 없다. 독자들은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하기가 쉬우며, 그렇기에 그녀의 업적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너무 크게 나갔다. 크게 나갔는데 그것을 감당하지 못했다.

내가 봤을 때 관객들은 엔딩에서 자괴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음, 알았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보는 법을 알아냈구나.

 그래서 가정을 꾸리고 한나라는 아이를 만드는 미래를 인식하고 실현하게 되었구나. 그게 반전이란 말이지.'

그래서 뭐?


물론 이 원작의 내용이 너무나도 추상적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도 저도 아닌 영화였다.

원작의 현학성은 대폭 거세하였지만, 정작 그 빈틈을 채워넣지 못했다. 그저 어떻게든 대중의 관심을 받아보려고 국제적 위기를 넣었지만

내가 봤을 때는 실패한 것 같다.


영화 내용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싶다면, 테드 창의 '네 이름의 이야기'를 사서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내가 제일 사랑하는 SF 소설집 중 하나이다.(나는 개인적으로 문학 중에서는 인문학과 과학이 놀랍도록 조화되어 있는 SF를 가장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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