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돼지(1992) - 낭만과 꿈

2016. 10. 31. 10:03감상/영화

반응형

 

 

 

붉은 돼지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항공기 취향을 듬뿍 담은 애니메이션이다. 그가 좋아하는 항공기가 수도 없이 나올 뿐더러, 그의 작품들 중 중요 테마인 반전과 사랑이 등장한다.

 내용은 간단하다. 마르코라는 이탈리아 공군 에이스가 어떤 저주에 걸려 돼지가 되었고, 현상금 사냥업을 하다가 그를 시기한 공적空敵들의 방해를 받으며 겪는 일들이다.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를 약간 변형시킨 시간선이다. 원래 역사대로 이탈리아는 연합국으로 참전하였고, 전쟁도 치뤘지만 항공기가 활성화되었다는 점이 차이가 있을 뿐이다.

 증기기관과 투박한 디자인, 인간과 기계가 균형을 이루며 공존하는 19c~20c 초기는 스팀펑크라는 새로운 분야로 재탄생하여 인기를 끌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또한 본 작품과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에서 스팀펑크 분위기를 볼 수 있다.

 많은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는 시대적 배경을 그저 장식으로 놓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1920년대라는 배경은 작중 내내 끊임없이 영향을 끼친다.

 

 참전으로 인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 이탈리아는 혼란을 거듭하다 결국 파시스트가 정권을 잡게 된다. 주인공 마르코는 이들에게 질려 결국 군인이 되기를 포기한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항공기 단속이 시작됨과 동시에 비밀경찰에게 추적받는 등 전체주의적 분위기가 커진다.

 작중 내의 중요 장소인 호텔 아드리아노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장 중 한 곳인 아드리아 해에 위치한다. 이탈리아-오스트리아-발칸반도가 경합하는 곳으로 이곳을 무대로 삼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커티스와 마르코의 공중전에서 서로에게 잡다한 무기를 던지는 장면은 실제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있을 법한 모습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무기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항공기에 무기를 잘 싣지 않았고, 급한 대로 권총이나 잡동사니들을 던져서 상대에게 타격을 주려하기도 했다. 물론 전쟁이 심화되면서, 기관총을 탑재하여 전투기를 양성하지만.

 

 

마르코의 기체에는 공화정을 상징하는 R이 새겨 있다. 코믹스에서도 공화주의자로 설정된 바 있다.

 

 

 이 작품의 주제는 꿈이다. 영화 내에서는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마르코에게는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싶다는 꿈이 있다. 그것은 전장에서 다른 사람들을 죽이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항공기에 기관총을 탑재하면서도, 사람에게는 쏘지 않는다. 어지간해서는 지킬 수 없는 신념이다.

 그렇기에 자신들과 적대하던 공적 연합과 도널드 커티스에게 생명의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 그들도 자신과 비슷하게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파일럿이기 때문이다. 작중 내에서 공적 연합과 커티스가 후반부에 마르코에게 친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애니메이션 특유의 낙관주의만으로는 볼 수 없다.

 나는 그들의 태도가 무의식적으로 발현되는 '연대'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해관계를 다투며 서로 죽이려고는 들지만, 똑같이 넓은 하늘에서 자유롭게 비행하는 파일럿이다. 그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던 '낭만'이 전체주의가 지배하기 시작하는 시대상과 맞물리면서 모종의 유대가 탄생한 것인지 모른다.

 그 유대와 신념을 가지고 마르코 파곳은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해서 비행하며, 엔딩에서는 그의 비행 씬으로 끝난다.

 

 사실 20년대라는 암울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작품의 분위기는 상당히 밝다. 오히려 '하울의 움직이는 성'보다도 더 밝은 것 같다. 하지만 마르코에 주목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그가 돼지가 된 이유는 작중 내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그림으로 추론해볼 수 있다. 지브리는 군인을 비롯하여 전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돼지로 그렸다. 공장에서 일하는 돼지, 실업자가 된 돼지 등 다양한 사람들을 돼지로 그렸다.

 그리고 마지막 컷에서 홀로 짐을 들고 항공기에 타는 돼지는 영락없이 마르코다.

 

 마르코가 돼지가 된 것은 전쟁으로 인한 인간성의 상실을 비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주변인물들도 돼지로 변한 마르코를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대한다. 다른 특별한 변화를 겪은 사람도 없는데 말이다. 주인공이 분명 전쟁 영웅이기는 하지만, 보통의 반응은 아니다. '돼지'라는 외모는 단순히 신체의 변화가 아니라 정서적 상태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하늘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들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싶다는 희망과 무기로써 사람을 죽인다는 절망을 함께 담고 있다. 이 딜레마는 주인공뿐만 아니라 미야자키 하야오를 붙잡고 있는 중요한 주제다.

 

 작중 내에서 전쟁을 기억하는 사람은 마르코 단 한 명밖에 없다. 그리고 돼지 또한 단 한 마리밖에 없다.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전쟁의 비인간성을 체득한 마르코는 '인간'으로서의 정서를 거부한다. 스스로 인간이 아닌 돼지가 되기를 자처하면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채 진행되는 시대 속에서 살아간다.

 

 즉, 마르코의 '돼지'는 전쟁에서 비인간성을 겪은 공허함을 나타내는 장치라 할 수 있다. 같이 참전했던 전우는 파시스트에게 부역하는 '인간'이다. 그 또한 전쟁을 겪었지만, 인간의 비인간성에 주목하지 않고 그저 살아가는 '인간' 사회 자체에만 주목하였다. 그렇기에 돼지가 될 수 없다. 돼지는 인간의 추악함에 마주한 자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후반부 커티스의 발언으로 그의 얼굴은 변화하였음을 언급한다. 그는 비로소 과거를 내려놓고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를 아예 기억하지 못하는 다른 '인간'들과는 다르다. 그는 인간의 비인간성과 인간성을 모두 체험한 자이다. 그가 인간이 된 것은 '인간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든지 돼지가 될 수도 있고, 인간으로 돌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때문에 그의 인간으로서의 얼굴의 생김새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 얼굴이 언제까지 지속되느냐인 것이다.

 끝까지 마르코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것은 아마 이 때문이 아닐까 한다.

 

 전체적으로 이 애니메이션은 결코 낮은 연령대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미 세상에 닳을 대로 닳은 사회인이나 중장년층 정도가 되어야 제대로 작품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잔혹한 현실의 벽 앞에서 낭만은 퇴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나 지난날 가지고 있던 꿈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발현되기를 내심 꿈꾸고 있지 않을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