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2017. 4. 8. 00:04감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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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 6점
토마스 프랭크 지음, 김병순 옮김/갈라파고스

 흔히 사람들은 자신의 계급에 따라 투표하기를 기대받는다. 왜냐하면 유권자가 자신의 이익에 기반하여 투표를 할 때 비로소 민주주의가 올바르게 작동한다고, 토머스 페인 이래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다. 가난한 사람들은 기업의 편에 서서 세금과 복지를 줄이고, 사회공공시설을 감축하는 공약을 내거는 정당을 지지한다. 
 자신의 이익에 기반한 계급 투표를 생각하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저자는 미국의 캔자스 주를 중심으로 이 현상을 설명한다. 한 때, 미국에서 가장 급진적이었던 지역이 어떻게 가장 보수적인 지역이 되어버렸는지의 과정을 근거를 들어 하나 하나 설명하고 있다.
 이 '계급 배반 현상'의 원인으로 저자는 크게 두 개의 원인을 상정하는데, 첫 번째는 보수주의 진영의 '문화 전쟁'이다.
 
 기존의 정치판도는 철저하게 경제적 이익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뉴딜 정책이 각광받았고,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이 실행되었으며 노동 조합 가입률도 상승했다. 노동자든 자본가든 모두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투표의 최우선순위에 두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은 다르다. 오늘날의 캔자스 주민들은 미국 전역에서 가장 비참한 주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신의 목을 옥죄는 공화당을 지지한다. 고속도로와 사회보장 민영화를 지지하고, 법인세 인하를 지지하며, 농업기업 규제 철폐를 외쳤지만 정작 그들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 설명한 불행한 일들-인구 감소, 식량 독점 기업의 성장, 전반적으로 부자에게 유리한 삶의 재편-은 10년이나 20년 전부터 진행되어온 것들이다. 그런 일이 일어났고, 지금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캔자스 사람들은 경제 문제에 관심이 없다. ... 후한 임금, 농촌지역에 대한 정당한 대우, 소도시 심지어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의 불행한 운명-이 모든 것들은 책에서 찾아볼 수 없는 진화론과 온갖 독창적인 방법으로 훼손되는 공교육 다음으로 관심이 먼 것들이다.
     -92~93p
 

 공화당은 캔자스 농민들에게 돈을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같은 문화를 약속한다. 총기의 자유, 기독교적 윤리, 낙태 반대 등의 옛 미국이 가졌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할 것을 제안한다. 

 그것이 비록 시대착오적이고 인종주의적이며 상당히 멍청한 짓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문화이며 정신이라 여겨지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사수하려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눈물나는 '보수주의적 문화'가 실제로 사수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문화라는 것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기에 절대 불변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대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심지어 그러한 약속을 한 공화당조차 문화 수호의 약속을 깨버리곤 한다.

 

 자신들의 요구가 '필연적'으로 좌절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캔자스 농민들은 분노의 방향을 민주당과 대도시 엘리트들에게 돌린다. 라테를 마시며 기괴한 복장과 문화를 쏟아내는 자유주의자들의 행동이 아름다운 미국의 문화를 망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자유주의에 분노하는 것은 캔자스 주의 농민 뿐만이 아니다. 2016년 대선에서도 보았다시피, 여러 주의 캔자스 농민이 분노하였다.

 

 문제는 무엇에 분노하냐는 것이다. 낮은 경제적 지위? 중국의 위협? 물가?


 분명 제2의, 제3의 캔자스 주민들은 분노하고 있었지만 그 분노의 정체가 너무나도 모호했다. 그들 다수는 하층민이지만 지난 날 '월가를 점령하라'처럼 재계를 향한 시위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금 감세 및 규제 폐지 등 시장자유주의적 정책을 노골적으로 옹호했다.

 멕시코인들의 불법 체류에 분노하지만, 정작 그들을 막을 뾰족한 수를 생각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장벽이다.

 언론이 편향되어 있으며, 잘못된 보도를 하고 있다고 분노하지만 정작 자신들도 편향되어 있으며 잘못된 괴담을 퍼뜨린다.


 '캔자스 농민'은 그 자체로 너무나도 모순되어 있는 존재다. 그리고 이 모순은 '좋았던 시절'을 망친 적대자에 대한 비난으로 해결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철저하게 경제적 이익을 제외하고, 오로지 대중과 동일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에 집중한 공화당은 그 본질에도 불구하고 대중친화적 정당이 되었다.


 현실을 도외시하고 있지도 않은 허상에만 사로잡힐 때, 정치가 왜곡되는 것이다.

 오바마케어 폐지에 지지했던 한 트럼프 지지자가 공공의료보험 축소에 당황하는 장면을 담은 짤방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의 문화전쟁이 먹혀들어갈 수있었던 가장 큰 배경은 계급 배반의 두 번째 원인인 민주당의 '변절'이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위치토의 보수 우파들이 그들 나름의 선거운동을 열심히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노동계급을 대상으로 전개된 민주당의 선거운동이 자멸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 클린턴이 우파를 수용하는 정치전략을 구사한 것은 결과적으로 볼 때 매우 어리석은 짓이었다.

(...)기첸은 선거 쟁점에서 중요한 경제 문제들이 사라지면 민주당과 공화당을 구별하기 위해 남는 것은 사회적 문제뿐이라고 말했다. (...)기첸은 "몇 년 전만 해도 공화당은 '부자들의 정당'이고 민주당은 노동자를 대변한다고 생각했다"고 쓴다. p221~222

 보수주의로 전향한 사람들의 다수가 경제적 문제를 도외시하고, 오로지 자신들의 문화에만 정치적 시선을 집중하게 만든 것은 공화당의 선거전략과 민주당의 노동계급에 대한 변절이 합체한 결과였다.

 민중들은 더 이상 민주당이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줄 것이라 믿을 수 없었기에, 정계에서 논의되는 경제 정책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즉, 민주당이 자유 시장이니, 중도니하면서 판을 깔아주고 공화당이 종교와 검소한 이미지를 내세워 행동한 결과가 노동자들의 계급배반 투표인 것이다.


 오늘날 트럼프라는 실로 이율배반적인 인물이 당선된 것은 이러한 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는다. 미국은 이미 두 개로 갈라졌다. 대도시에 사는 자유로운 문화와 소도시의 검소한 문화는 서로 충돌되고 있다.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가 맞서고 있고, 크리스마스를 금지하려는 정치적 올바름과 전통이 대립하고 있다.


 이러한 분열의 상황에서 트럼프는 보호무역이니 관세장벽이니 하면서 노동자들의 편이 되어주는 척하면서도, 기업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 사람들은 트럼프의 경제정책이 정말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상대는 거대 언론과 월가의 친구인 힐러리다. 자신들의 편이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선거 쟁점에서 경제 이슈가 힘을 잃고 나면, 이미지 이슈가 무대를 차지하게 된다. 결국 트럼프는 자신의 이미지를 주류에 도전하는 아웃사이더로 각인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실제로는 아니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미국 국민들의 분열에는 양 정당의 책임이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중산층과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민주당의 정책 기조가 상당히 유리하지만, 클린턴 이래 굳어진 민주당의 이미지가 방해하고 있다.

 어쩌면 공화당과 민주당은 겉으로는 서로 싸우는 척하지만, 뒤로는 암암리에 서로 돕고 지내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미국 그것도 캔자스 주를 중심으로 이론을 설명하고 있다. 미국의 유명한 도시도 아니고 캔자스라는 시골 동네를 대상으로 하다보니까 전혀 익숙치 않은 인물명이나 기업, 사건들이 마구 튀어나온다.

 그리고 솔직히 계속 읽다보면 하는 이야기가 뻔하긴 하다.



 하지만 왜 가난한 사람이 친기업 정당에 투표하는지, 또 왜 미국이 두 개로 갈라졌는지의 상황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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