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가르히-러시아를 이해하는 키워드

2017. 5. 3. 22:58감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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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가르히 - 10점
김병호 지음/북퀘스트


 올리가르히(Oligarch)는 과두재벌을 가리키는 러시아 말로, 과두정(Oligarchy)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소비에트 연방 붕괴 시절, 공산귀족인 노멘클라투라와 똑똑한 젊은 대학생들이 러시아의 문호 개방과 자유 경제 이행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편승하여, 자본주의 사업가가 되었는데 바로 이들이 러시아 경제의 절반을 지배하는 올리가르히의 원류라 할 수 있다.

 러시아의 부의 절반은 이 올리가르히가 차지하고 있는데, 푸틴이 장기 집권한 아직까지도 소득 불평등은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뭐가 나쁠까? 하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올리가르히는 미국의 혁신 사업가들이 결코 아니다.

 보리스 옐친이 소비에트 연방을 해체하고 자본주의 개혁을 시작할 당시, 남다른 정보력을 가지고 있던 노멘클라투라와 대학생들은 이미 시대가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야망을 위해 노골적으로 국가를 좀먹었다. 당시 옐친은 정책 이행을 위해서 공적 자금이 필요했는데, 자본주의 체제 전환 겸 공기업들을 민영화하는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공개된 경쟁 입찰을 통해서 가장 높게 부르는 사람에게 경영권이 돌아가야 했지만... 이곳은 러시아였다.


 공개 경쟁 대신 협잡과 폭력이 빗발쳤다. 고위 관료들에게 뇌물을 주면서, 단독 입찰을 하기도 하고 어떤 자들은 경쟁자들이 입찰지로 가지 못하도록 비행기를 못 띄우게 하거나 도로를 막기까지 했다. 국민들에게 나누어준 주식 바우처를 헐값에 대량 매수하여 기업 사냥을 하기도 하였고, 정치 권력과 결탁하여 경쟁자의 재산을 빼앗기도 했다. 정부 부처의 자금을 자신들의 은행에 유치한 다음, 대규모 환치기로 한탕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정상적인 기업가가 아니었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더러운 수단으로 돈을 긁어모았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과두재벌이다. 반 세기 이상을 공산주의 속에 살아온 러시아 국민들은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조금도 알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자본주의 체제는 너무나도 낯선 것이었다. 주식투자로 1300% 수익률을 보장해준다는 사기를 있는 그대로 믿어 사기를 당할 정도였다.


 이런 시대의 격동기 속에서 노멘클라투라들 본인들이 소비에트 연방을 내부에서 갉아먹은 장본인이면서, 이번에는 신생 러시아 연방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들은 정치권력을 제외한 모든 것을 쥐고 있었고, 몇몇이 관직과 연계되면서 조만간 정치권도 포섭할 듯 보였다.


 '130%의 지지율'로 대표되는 독재자, 블라디미르 푸틴에 대한 러시아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는 올리가르히라는 배경을 이해하지 않으면 절대 그 본질을 알 수가 없다.


 맨 처음, 올리가르히는 젊은 푸틴을 애송이라고 얕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큰 실수였다. 그는 '강한 남자'였고, 곧 자신의 몽둥이로 올리가르히를 패기 시작했다. 올리가르히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리던 러시아의 정세가 푸틴의 등장으로 정부라는 새로운 축이 형성된 것이다.

 특유의 쇼맨십과 카리스마 그리고 부도덕한 올리가르히의 명성이 그와 공권력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이다.


 때문에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던 올리가르히는 푸틴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수밖에 없고, 소치 올림픽에서도 그들의 자금이 유효하게 사용되었다. 만약 거부한다면, 푸틴이 보낸 FSB에게 크게 당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도 순순히 협조하고 있다.

 또한 푸틴이 올리가르히 해체나 급진적인 재분배 정책을 시행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은 일정부분 정치권에게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자금을 헌납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다.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강력한 중앙 정부와 한 국가의 부를 쓸어담은 소수의 재벌들. 이 두 축은 서로 대립관계에 있으면서도 서로의 입지를 보완해주는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러시아 정치의 본질이다.


 이 저서는 러시아 경제와 정치의 핵심인 올리가르히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보통 러시아에 대한 책이라 하면, 블라디미르 푸틴이나 역사, 문화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강한데 특이하게도 올리가르히를 주제로 담으면서 본질에 바로 다가가고 있다.


 물론 셰일 오일과 경제 제재 등으로 러시아 경제가 악화되면서 블라디미르 푸틴의 지지율은 예전만 못하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의 내용이 약간 뒤떨어진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올 수 있다.

 하지만 푸틴이 불과 몇 년전까지만 하더라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지지를 어떻게 받아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며, 그것을 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그 어느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러시아 재계의 실상을 시원하게 밝힘으로써, 현대 러시아의 단면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각 올리가르히를 일일이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약간 생소하고 지루하기도 하였지만,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는 데 이런 전문적인 부분은 감안해야 하지 않을까.


 아쉽게도 이 책은 절판되었는데, 중고서점이나 온라인 서점 등에서 파는 곳이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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