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6. 3. 15:28ㆍ카테고리 없음
3층 서기실의 암호 - 태영호 지음/기파랑(기파랑에크리) |
이 책을 보기 전에 난 두 가지 점을 주목했다. 첫째, 느닷없이 출판되어 인기를 끄고 있는 대북 관련 서적이라는 점. 둘째, 출판사가 한때 극우 서적들을 즐겨 출판하던 기파랑이라는 점.
이 점들이 네거티브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서 그동안 섣불리 손을 뻗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태영호 전 공사에게는 일말의 편견도 갖지 않고 있었으며, 오히려 그의 식견에 동조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출판사의 전적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다.
또한 자꾸 어디선가 금서로 지정될 것이라는 헛소문인지 노이즈마케팅인지에 대한 반발심도 한몫했다.
그러나 결정을 내린 것이 어제. 결국 책을 보기로 했다.
의외로 본 서적의 내용은 심플했다. 북한 외교성에 있었던 각종 내막들을 이야기하는데, 상당히 인상 깊었다. 대북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대사관 유지할 비용이 없어 담배 밀수하던 외교관들 이야기. 납북 일본인 가짜 유골 반환 사건이 알고 보니 북한에 유전자 감식 장비가 없어서 그랬다는 이야기. 영국 공산당이 북한의 잡다한 연례 행사로 짜증내는 이야기 등 고위급 간부들만이 접할 수 있는 ‘썰’이 많았다.
북한의 열악한 환경과 권위주의적 체제가 빚어내는 촌극들이 저자의 필력과 맞물려 신선하게 다가왔다.
또한 앞으로의 대북 이슈에 대한 통찰도 볼 만했다. 잊을 만하면 꼭 나오는 한반도 종단 철도에 대하여 그는 비관적인 시각을 견지한다. 동해안에 수많은 군 부대가 있는데, 철도를 지으려면 이 기지들을 철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령 북한이 철거에 동의한다하더라도 북한에는 돈이 없으니, 한국과 러시아가 알아서 비용을 대야 할 것이라 예측한다.
저자는 북한의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체제를 공격하면서, 세 가지 의견을 제시한다.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 김정은의 핵 포기 불가, 북한 민중 봉기에 대한 희망이 그것이다.
햇볕정책(책에서는 김대중 정부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북한이 유럽과 수교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처음부터 핵 개발을 의도했던 김정일의 시간 끌기에 당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북한의 핵 개발은 김일성 시기부터 거슬러 올라오던 사업이며, 장비 노후화 및 경제 악화로 재래식 군사력이 무력화된 지금 북한은 핵 보유를 유일한 생존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고 언급한다.
태 공사는 북한 민중에 점차 침투되고 있는 한국 문화에 주목하여, 민중 봉기가 곧 실현될 것이라 예측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북한에서는 여러 차례 봉기 및 쿠데타가 일어났으나, 중앙 정부에 의해 진압된 전적이 있다. 세포 조직에 의해 무력화된 민중들이 봉기를 일으켜 성공할 가능성은 한없이 낮다고 생각한다.
본 서적은 북한 외교성의 상황을 자세히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비록 자서전이기에 세부 내용에 교차 검증이 필요할 것이나, 한국의 이익에 반할 만한 내용은 없어 보인다.
햇볕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보이지만, 광화문 광장에 흔히 보이는 극우 광신도들의 논조와는 다르다. 광신도들이 악의를 가지고 나라를 팔아 넘겼다고 주장한다면, 태 공사는 북한의 이중 플레이에 속아 넘어갔다는 식이다. 관련 내용도 한국 정권을 비난하는 구석이 적고, 북한의 이중성을 공격하는 데에 집중되어 있다.
일부 광신도들이 이 책이 현 정부를 불편하게 만들 거라며, 트롤링하기도 한다. 정작 대부분의 사람들은 침착한 것을 보면 본 책의 내용이 신도들이 상상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이슈에서 다른 스탠스를 취하더라도, 이 책은 분명 가치 있는 책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