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 - 장그래는 언제쯤 YES가 될까

미생 1 - 윤태호 글.그림/위즈덤하우스

 나는 미생을 드라마로 먼저 봤다. 그래서인지 여러 연출이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많았는데, 만화를 보니까 그 연출의 배경이 하나 둘씩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드라마도 잘 만들었지만, 원작이 더 와닿았다.

미생은 다들 이미 알다시피, 바둑 용어다. 집 하나만 구성되어 있어, 언제든지 상대에게 공격받을 수 있는 처지를 말한다. 언제나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회인들의 모습이 미생과도 같아, 작가가 그렇게 이름지었는지도 모른다.

고졸 출신에, 기원을 나와 아무런 스펙을 쌓지 못한 주인공 장그래를 중심으로 회사 생활을 풀어나가는 작가의 스토리텔링에는 감탄을 할 수밖에 없다. 보통 회사 생활을 그리는 작품들은 모종의 환상에 빠진다던가, 디테일은 그냥 얼머부리는 경우(대표적으로 시마 시리즈)가 많은데, 미생은 탄탄한 조사로 그런 쉬운 길을 포기했다.

사실 잔인하게 말하면, 장그래는 '인맥빨'의 낙하산이다. 드라마에서는 초반에 이 부분을 끈질기게 부각시켰는데, 정당한 비판이었다. 정규 루트를 거치지 않고 암암리 높으신 분들의 사정에 의해 특별 채용된 그의 첫 출근은 우리 사회의 한 부분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으로는 그처럼 우수한 통찰력을 가진 인재도, 스펙이라는 겉모습에 의존하는 정규 루트에서는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 또한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자신과 동일한 혹은 그 이상의 노력 없이 손쉽게 이득을 보는 사람을 한국인들은 경멸한다. 그래서 정유라가 비판받았고, 최순실이 공공의 적이 되었다.

그렇다면 장그래도 비판받아야 할까?

글쎄. 그래야 한다고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장그래는 '불쌍하기' 때문이다. 낙하산이지만 정규직도 아니고, 계약직이며 비록 드라마이기는 하지만 갖은 차별을 다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쌍해서라도 예외로 하고 싶은 것이 대부분의 한국인들의 심리일 것이다.

정말 그런가? 그게 옳은 걸까?

그렇다면 장그래가 계약직이 아니라 정규직으로 채용되었으면 사람들은 기꺼이 욕할 수도 있겠다. 불쌍하지 않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장그래의 채용에 대해서 나는 옳다 그르다의 판단을 내리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장그래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특채라는 채용 절차의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뭔가 세상이 공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공정의 방식이 웃긴다. 시험이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문제의 틀을 가능한 많이 맞추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시험은 전혀 공정하지 않다. 그 사람의 인생이나 경력, 능력들을 온전하게 평가할 수 없다. 그저 누가누가 기출을 많이 풀었나, 시험 운이 좋았나, 암기력이 좋았나, 그날 컨디션이 좋았나를 따질 뿐이다.

그나마 고시 수준 밑의 시험은 사고력을 묻지 않는다. 그저 암기와 행운을 물을 뿐이다. 그런데도 공정하다고? 글쎄, 나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시험 만능주의는 오늘날 '헬조선'을 만든 공신 중 하나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그 우상을 증오하면서도, 결코 버리지 못한다. 그것이 아니면 자신들을 '공정'하게 대해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옭아매면서, 자식에게 자신의 삶을 되풀이한다. 누구나 헬조선을 외치지만 정작 그것을 해결하려고, 아니 그것의 문제를 제대로 응시하지도 않는다. 참으로 가련한 풍경이 아닌가.

이길 자격이 있지만 정형화된 틀에서는 결코 측정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작중에서는 장그래로 대표된다.

 그 '예외'를 발굴하기 위한 모종의 사회적 절차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특채를 증오한다. '장그래'의 필요성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싫어한다.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증오스러운 것은 전혀 공정해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처럼 기여입학제는 없지만, 기업의 임원들과 친분이 있다면 언제든지 본인의 능력과 관계없이 누구나 부러워하는 대기업 정규직으로 특채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가 어떤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사회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사람들이 특채된 사람에게서 알 수 있는 것은 그저 그가 '줄'이 있다는 것 뿐이다.

그래서 분노한다. 최순실의 아들은 비선실세의 자녀라는 이유만으로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우수한 대학생들이 못가서 안달하는 5급 행정관 자리를 딱지치기 하듯 손쉽게 얻었다.

박근혜와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헬스 트레이너 출신은 3급 고위 공무원이 되었다. 누군가는 일선에서 평생 일해도 얻을 수 없는 지위를 어떠한 공개적 입증 없이 그냥 거저 얻은 것이다.

현재 권력계에서 나온 것만 이렇지, 실제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할 것이다. 사람들이 특채를 증오하는 것도 이러한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특채에 대한 신뢰의 상실, 나는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는 한 한국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다.

고위층과 권력집단이 특채를 소수의 '괴짜'들을 뽑는 데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기 애새끼들을 꽂아넣는 데에 사용하고 있다. 민간의 한심한 특채 운용은 자기 자신의 기업 경쟁력을 갉아먹을 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뿌리를 흔들고 있다.

기업이 아닌 정부의 공식적인 특채의 기준도 볼품없다. 지방대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수도권 출신의 대학생이 '지방인재'가 되어버리는 지방인재특채, 인적자원의 질조차도 의심스러운 특성화고교 특채, 아예 대놓고 특정 직업군을 공무원으로 격상시키려는 정유라법까지 공직사회의 특채 운용도 한심한 수준이다.

 

장그래는 특채 출신이다. 하지만 공채로 채용된 그 누구보다도 우수한 인재다. 

지식이 부족하고, 경험이 부족하며, 소심하지만 그에게는 누구도 가지지 않는 통찰력이 있고, 결단력이 있다. 

그러나 그의 능력은 영업3팀과 주변인물들밖에 모른다. 그의 능력을 세상에 알릴 기회가, 인정하는 사내 분위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평생 계약직이다. 실력을 '공정'하게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원 인터내셔널 사옥의 한쪽 벽에 YES라고 적힌 쪽지를 꺼내는 그의 뒷모습은 아직도 아련하다. 그가 퇴사할 무렵의 문구는 아직도 눈에 선하다.

돌아보니 그것은 이미 내 것이 아니라는 듯 차가워져 있었다. 인프라는 나 자신이었다.

이 두 문장이 그를 향한 세상의 시선과 그의 자격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자격이 있음에도 인정받지 않는 장그래. 언제쯤 사회는 그를 품을 수 있을까.

그는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슬픈 것이 아니다. 그는 능력이 있음에도 인정받지 못하기에 슬픈 것이다.

세상에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하지만 가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시스템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그러한 부분은 사람의 판단에 맞겨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신뢰가 필요하다.

한국 사회의 시스템은 장그래를 품기에는 신뢰가 부족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특채의 극단적 투명화를 주장한다. 누가 누구를 추천하였는지 명백히 밝히는 풍조가 탄생해야 한다. 

또한 일정 기간을 두고 심사하여, 자격이 미달될 경우 바로 채용 중지하고, 추천인에게 패널티를 부과하는 검증 절차도 필요할 것이다. 

물론 이조차도 완벽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또한 공공기관의 소위 정치적 목적의 특채를 모두 일소하고, 경력직 위주로 특채를 재편성해야 한다.

 한국의 가장 큰 문제는 심사 위원회의 부재 혹은 무력화다. 정치인들이나 고위 공직자들은 시스템을 개선하는 데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어떻게든 자신들의 쇼맨십을 과시할려고 몸부림친다. 그래서 정유라법이라는 법안이 탄생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행보는 이 나라에 득이 아니라 독이 된다. 문민정부 이래, 시스템을 무시하고 쇼맨십을 과시해서 좋은 결과를 가져왔던 적은 내가 알기로 거의 없었다.

설령 있다하더라도, 쇼맨십은 그 개인이나 집단이 제대로 온전할 때다 효력이 있는 것이다.

시스템의 정비가 오히려 더 급선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닐까.

모든 사람이 일괄적으로 동일한 시험을 보고 1위부터 몇위까지 순서를 나열하고, 짜르는 것이 공정의 일부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능력이 있는 사람이 정당하게 평가받는 것도 공정의 일부일 것이다.

한국에서 누구나 아는 충무공 이순신은 전쟁 전, 일개 종6품 정읍 현감에서 정3품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몇 계급이나 뛰어넘는 특진을 받았다.

하지만 오늘날 그 누구도 충무공의 특진이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자격이 있는데, 특진이 대수일까?

오히려 그가 '낙하산'을 탄 덕분에 조선은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피해를 경감할 수 있었다.

천거제로 대표되는 특채는 그 자체로 악이 아니다. 단지 운영하는 인간이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이용하는 인간을 철저하게 감시하면 되지 않을까?

다른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피추천인이나 추천인을 철저하게 검증한다면, 뇌물이나 학연이나 혈연에 의한 부작용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 그것이 진정으로 공정한 사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