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9. 6. 11:44ㆍ감상/책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열린책들 |
그리고 내 추측은 적중했다.
이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00세 생일을 맞이한 알란이라는 노인이 생일 파티에 참가하기 싫어서, 양로원을 탈출하다가 멍청한 갱의 돈가방을 훔치고 또, 그 갱의 추격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좀도둑, 핫도그 장수, 코끼리 키우는 욕쟁이, 갱 보스의 형과 친구가 된다는 내용이다.
소설은 현재와 과거를 번갈아가면서 서술하는데 솔직히 과거편은 서사적 완성도가 매우 떨어지고, 무엇보다도 재미가 없다.
알란이 정신병자로 몰려 거세당함->잠깐 취직하다가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를 구함->그 답례로 미국을 가게 되고, 미국에서 핵 개발에 도움->그 덕분에 트루먼과 친구가 되고 중국에 파견->마오쩌둥 아내인 장칭을 구함->그 답례로 나중에 북한에서 살아남 등등
주인공이 세계 일주 스토리는 결국 어디에서든 주요 인물을 도와주거나 구해줘야 한다는 신화적 서사를 담고 있다. 문제는 그 형식이 정형화되어 있어서, 나중에는 참을 수 없이 지루하다는 점이다. 참신함이 없고, 그렇다고 위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통찰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우연에 우연이 겹칠뿐이다.
솔직히 과거 이야기가 전개될 때, 약소국이 우연을 틈타 말도 안되는 짓거리를 해서 강대국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그랜드펜윅 시리즈처럼 블랙 유머로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이 소설의 과거편은 과거 역사에 대한 비판적 시각 혹은 새로운 관점, 기존의 관점 하다못해 역사를 아는 사람들끼리 웃을 수 있는 가십거리라도 제공하지 않았다. 스토리 자체도 재미없는데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으니, 이보다 더 나쁠 수가 있겠는가.
현대편은 그나마 나았다. 어디까지나 300페이지 부근까지만. 검사가 주인공 일행을 찾아와서 이야기를 들으려는 부분부터는 정말 짜증날 정도로 재미가 없었다. 검사가 왜 빡쳤는지 이해가 갈 정도였다. 내가 그 검사였으면 커리어고 나발이고 그놈들 입 좀 다물게 다 구치소에 쳐넣었을 것이다.
대체 왜 쓸데없는 변명 파트를 넣어서 독자의 귀중한 시간을 잡아먹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주인공 일행이 사람 죽이고 감방 안 가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 소설 50페이지만 읽어도 현실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텐데?
나는 이 책을 읽기 전 할배의 경륜이 묻어나는 유머와 개드립 그리고 잔잔한 웃음을 자아내는 동화적 상상력을 기대했다. (마치 심슨의 에이브처럼?)
하지만 소설은 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상당히 좋은 소재였음에도, 너무 상상력이 부족했다. 유쾌한 분위기를 이어갔지만 그 속은 텅 비어 있다.
내용이 텅 비어있으면 계속 웃기기라도 해야 하는데, 완급 조절에 실패해서 책 절반 부분은 그냥 안 읽어도 되는 쓰레기가 되어버렸다.
결론을 내보자면, 이 책은 나쁜 책은 아니다. 분명 초반은 일반적으로 스토리 대상으로 설정하지 않을 법한, 할배의 일상 탈출을 유쾌하게 풀기 때문에 전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중반부부터 주인공은 '할배'가 아니다. 그냥 시중의 다른 소설들 주인공과 똑같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을 이유가 뭔지?
초반의 포텐을 이어가지 못하고, 도중에 주저앉은 것이 안타까웠다. 내가 알기로 작가의 첫 작품이라 들었는데, 다음 작품에서는 좀 더 완급 조절을 잘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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